이근배 시인이 편집한 한국대표 명시선 100을 두고 말들이 많았는데, 이 책 한 질을 얻어들게 되었다.
얻기는 서울 아리랑 고개에서 삼각산 쪽으로 올라간 곳에 있는 흥천사에서 였는데, 이 책을 들고 서울역에 보관해 두고는 급히 대구에 왔다 갈 일이 생겼다.
추석 뒤끝이라 코인로커들이 전부 만원이고 달랑 하나 가장 작은 함이 남았다. 시집 전질이 그대로는 다 들어가지를 않아 그 자리에서 박스를 버리고, 책을 차곡차곡 넣고 떠나려 할 참이다.
그때 흥천사에서 이근배 시인이 만든 시전집에 대한 품평 생각이 났다. 무난히 잘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 안 할 사람들도 문단에 많겠지만, 그래도 균형 감각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듣고 있던 이근배 시인이 심훈 시를 자기 아니면 누가 100선에 넣겠느냐고 했었다. 나는 평소에 공초 오상순이나 노산 이은상에 대한 이 분의 높은 식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었다.
100권 책 가운데 심훈 시집을 뽑아들고 기차를 탔다. 가방안에는 스피노자 평전 한 권이 더 들어 있었지만, 도대체 심훈의 시가 100선에 들만 한지 살펴보자는 심산이었다.
선배의 척도를 다시 재보자는 뜻이 아니라 마침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관해서 써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연구자로서는 아무래도 소설 쪽인지라 심훈을 소설가라고만 여겼는데, 시인이라니 그 정도를 한번 가늠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거운 100권 책을 들고 광화문, 공덕역, 서울역을 오르락내리락 했더니, 허리가 몹시 고장이 났다. 최근에 유난히 몸이 안 좋아진 것은 글 욕심 때문이려니 해서, 줄이려 해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작업량이다. 정말로 화끈거리는 허리에 제일파프를 붙이고 아침에 대구에서 일어나니 겨우 진정이 되는가도 싶어 볼일보고 돌아올 때는 무궁화 호를 탔다.
무궁화 호가 좋다. 두 시간 서울에 빨리 가면 뭘 하겠나 싶고, 가면서 무궁화 호 넓은 좌석에 앉아 심훈 시집이나 읽어볼 심산이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결코 좋다 할 수 없는 허리를 애써 지탱하여 시집을 펼쳐보니, 심훈은 1901년 10월23일에 나서 1936년 9월 16일에 죽었더라. 서울 노량진 태생이고, 1919년에 3·1운동에 가담해서 투옥되었고, 중국에 유학했으며, 충남 당진으로 낙향해서 `상록수`를 썼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이라.
장티푸스에 걸려 치료를 받다가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오랜 세월 흘러 약력을 살피는 사람 마음에도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시들을 한 편 한 편 읽어가니, 그는 민족의 현실에 가슴으로 괴로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노래를 부르랴면 카루소처럼 높은 음역을 다스릴 줄 알고 살랴핀처럼 베이스의 저음까지, 자신과 우리의 설움을 버무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겨울에 얼어죽지 않고 봄에 자기 눈에 모습을 보인 늙은 거지를 가리켜, “죽지만 않으면 팔다리 뻗어 볼 시절이 올 것을 점 쳐 아는 늙은 거지여 그대는 이 땅의 선지자로다”라고 노래했다.
지금 무궁화 호는 영동 역을 지나칠 참이다. 잠시 시집을 덮고 생각한다.
이 사람의 시에는 슬픔과 분노와 의지가 담겼구나. 그가 100선에 들어야 할 사람인가를 따져 묻기 전에, 이 사람은 적어도 설경작이나 하지는 않았다고 말해 주어야 하겠구나.
참된 시는 정신도 음률도 빼어난데서 나온다. 둘 다 충분해야 진짜 시라고 할 것이다. 무뚝뚝한 시도, 간살스러운 시도, 무엇이 낫고 못하고가 없다.
그날이 오기를 그토록 염원하던 심훈. 그는 비록 그 날을 못 보고 요절하고 말았으나, 그의 염원은 멀지 않은 미래에 이루어졌으니, 그는 시인이기 이전에 선지자였다. 모든 시대에는 선지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