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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를 새 눈으로

방민호 서울대 교수
등록일 2013-07-18 00:15 게재일 2013-07-1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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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며칠 동안 창춘에서 연길로, 거기서 다시 하얼빈으로 가는 만주 여행을 했다.

창춘은 중국 동북삼성의 하나인 길림성의 성도다. 또한 그곳은 옛날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서울이기도 했다.

만주국은 이른바 오족 협화, 즉 일본인, 조선인, 만주인, 중국인, 몽고인이 힘을 합쳐 호혜, 평등하게 살아간다는 이념을 내건 일종의 `의사` 국가였다. 황제도 있고, 내각도 있지만, 이 나라가 독자적인 국가 몫을 해냈다고는 평가되지 못한다.

그러나 오족협화라는 구호를 보면 만주가 얼마나 복합적인 민족 구성을 가진 곳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연길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중심도시다. 연변과 바로 이웃한 용정에 가서 보니, 땅은 비록 중국 땅일지언정 조선족이 중요한 존재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단박에 실감할 수 있었다.

연길에 조선족은 전체 인구의 약 60퍼센트, 용정에는 70퍼센트 정도가 된다고 한다. 만족이나 그밖의 민족들의 인구는 몇 퍼센트도 안되므로 현재의 연길이나 용정은 조선인 다수의 이중도시인 셈이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전체 인구에서 조선족 비율은 약 40퍼센트라고 하는데, 그것만 해도 자치주 내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구 비율이다. 이를 반영하듯 연길이나 용정에서 상점 간판들은 한글이 위에 써 있고 한자가 아래에 써있다. 이른바 소수 민족 우대일 것이다.

하얼빈은 그런 다민족 동거의 역사가 훨씬 더 길다. 내가 알기로 이 하얼빈은 러시아가 개척한 도시다. 지금은 중국땅이 되어 있지만 키타이스카야 거리라고, 러시아인들이 건설한 거리가 지금 국제적인 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나는 며칠전 바로 그 키타이스카야 거리에 서 있었다. 지금은 그 이름이 중앙대가라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중국의 문화 역사 보존 정책에 따라 거리도, 상당수 건물도 잘 남아 있다.

옛날에 작가 이효석은 이 하얼빈을 사랑해서 1930년대 말 1940년대 초에는 거의 해마다 이곳을 찾았다. 그때 이효석은 아마도 이 거리어 아직도 남아있는 호텔에 머물렀던 듯하다.

나는 그 모데른 호텔 3층에 올라가 거리를 내려다보며 바로 이효석이 이렇게 동양인과 서양인이 혼거하고 있는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겠다는 상념에 잠겼었다.

지금 북한은 외톨이 고립국가가 되어 있지만 한국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민족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북한까지 아우르게 될 동북아 민족지도를 새로 그려본다.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동북아시아 한반도와 중국 동북 삼성 지역은 제 민족들이 혼거하는 역동적인 무대가 되어 있고 경제나 정치, 국제 관계가 발전할수록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소용돌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듯 언어와 습속이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사는 시대를 준비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동거, 혼거, 공동생존은 단순히 의식의 증진만으로 이룩되지 못한다.

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고 뒤섞여 사는 것이 힘든만큼 여기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민족 동거와 혼거, 교류의 경험이 적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제 민족 동거의 국제화 현상을 단순히 예외적인 문제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나는 지금까지보다 더 전격적이고 전향적이며, 판을 크게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동북아시아는 바야흐로 새로운 공존방식을 찾아나가야 한다. 북한도 이 흐름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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