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장사 하는 A가 제 하루 일과를 이렇게 보고한다. 오늘 넘 힘들었어. 자꾸만 에누리하려는 손님들 때문에 밑지고 팔다 보니 남는 게 없어.
이때 A를 응원할 겸 평소 원칙에 충실한 B가 나선다. 올바른 상도덕을 위해 의류정찰제가 하루 빨리 정착되어야 함을 피력한다. 그때 C가 나타나 의류정찰제만이 능사는 아니며, 정가제를 한다고 상도덕이 지켜지는 건 아니라며 반박한다. 기분이 상한 B는 자신은 A에게 한 이야기인데 왜 C가 나서서 물을 흐리냐고 재반박을 한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C는 단체방에서 하는 얘기는 누구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냐, 그러니 당사자가 아니라도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흥분을 한다. 이때 평소 방관자였던 D가 나타나 B가 틀린 말 한 건 아니니 이해하라며 슬쩍 B편을 든다.
역시 방관자였던 E도 뒤질세라 제 의견도 맘대로 못 내놓을 것 같으면 단체대화방이 왜 필요하냐고 C를 두둔한다. B는 A를 위로하려는 제 진심이 왜곡되었다며 단체방을 탈퇴한다. 결국 분란이 생기는 대화방은 없느니만 못하다고 방을 개설한 F는 단체 계정을 폭파한다. 그 다음 끼리끼리 모여 대화방을 재개설한다. 그렇다고 평화가 오나? 천만에! 그 안에서 또 새로운 분란은 지속된다. 그렇게 삶은 정반합 계속된다.
과장되게 소셜 네트워크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 예를 들었지만 이는 대화법에 대한 여러 시사점을 제시해준다. 특히 정치인들을 둘러싼 알레고리로는 이보다 나은 예도 없다. 그들이 흘리는 말은 보기에 따라 언제나 옳거나 항상 그르다. 옳거나 그른 그 말에 국민들은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다면 대화의 방식이다. 위 예에서도 보듯이 내용만 보면 그들 역시 다 옳다. 하지만 형식면에서 보면 그들 모두 그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언제나 정의를 지혜로 실천할 수 있는 타협의 방식이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