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회성 경험인 통찰학습에 대해 심리학자 쾰러는 침팬지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우리 밖에 바나나를 두고 침팬지 곁에는 막대기 하나를 비치했다. 침팬지는 바나나를 집으려고 손을 내밀어보지만 허사였다. 녀석에게 바나나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침팬지는 연구자를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무심한 연구자가 도움을 줄 리 없다. 이윽고 침팬지는 옆에 있던 막대기를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거리까지 바나나를 막대기로 끌어 당겼다. 바나나를 손에 넣은 순간 침팬지는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침팬지가 바나나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시행착오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즉, 반복 학습이나 점진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지적 체험이 아니었다. 사태를 파악하는 눈과 문제를 해결하는 통찰을 어느 한 순간에 깨친 것이었다. 목욕하다 유레카를 외치며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아르키메데스나, 떨어지는 사과 앞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도 이런 통찰의 순간을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통찰은 온 우주와 대면하는 나만의 고유 방식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스스로 변화를 시도하는 한 지점이 있다. 자신의 심적 상태와 처한 상황에 따라 그 힘이 제대로 발휘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사물이나 사람을 많이 경험하고, 다양한 독서를 한다고 통찰이 깊어지는 건 아니다. 내 안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내공이 쌓일 때 문제 해결의 직관이 생긴다. 한데 그 순간이 쉽게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저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보이는 바나나를 앞에 두고 일희일비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다. 그런데도 통찰의 눈썰미는 멀기만 하고.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