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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다는 것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3-03-29 00:16 게재일 2013-03-29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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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은 사랑을 정의하기에 가장 적절한 유형이다. 왜냐면 착하다고 말할 때 그 대상은 자신이 아닌 타자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넘어서는 타자라는 대상이 있어야 사랑이란 말이 성립된다. 상대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타자에게 수렴되지 못하는 일방적 감정은 욕망이고, 나를 향한 사랑, 즉 자기애는 한낱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분명 사랑의 대상은 타자인데, 몹쓸 사랑의 속성은 욕망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제 인격적 호의를 타인에게 베푸는 행위가 몸에 밴 경우 우리는`착하다`고 한다.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허당인 사람, 현명한 사람, 착한 사람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주부인 친구 세 명이 시장엘 갔다 치자. 마침 늙은호박 세 덩이가 떨이로 나와 있다. 한 친구는 작은 애호박 하나가 덤으로 붙은 것을, 다른 친구는 눈썰미를 발휘해 알뜰살뜰 따진 것을, 마지막 친구는 두 친구가 고르고 난 남은 것을 선택한다. 차례대로 허당인 사람, 현명한 사람, 착한 사람으로 명명할 수 있겠다.

애호박 덤이 붙은 호박을 산 친구는 그 속을 갈랐을 때 안이 다 썩었다고 했다. 따져가며 산 친구는 똑 소리 나는 살림꾼이긴 한데 인간미는 없다. 마지막 남은 것을 고른 이의 호박은 제일 작았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앞의 두 친구가 호박이라는 `물건`에 시선을 뒀다면 착한 친구는 타자라는`관계`에 눈길을 줬다.

자신보다 타자에게 선의의 시선이 먼저 가는 사람, 즉 착한 사람은 관계 지향적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세상의 온도는 생각보다 따뜻하지 않다. 착함의 숭고함이 평가절하 되는 나날일 것을 착한 사람들조차 느끼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착하다`고 말하면 그다지 반기는 것 같지가 않다. 착하다고 말하는 것이 결례일 정도로 `영리한 현명함`을 강요하는 사회는 아닌지. 착하기보다는 현명하기를 학습시키는 사회가 바른 것인지 헛갈리기만 한다.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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