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격적 호의를 타인에게 베푸는 행위가 몸에 밴 경우 우리는`착하다`고 한다.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허당인 사람, 현명한 사람, 착한 사람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주부인 친구 세 명이 시장엘 갔다 치자. 마침 늙은호박 세 덩이가 떨이로 나와 있다. 한 친구는 작은 애호박 하나가 덤으로 붙은 것을, 다른 친구는 눈썰미를 발휘해 알뜰살뜰 따진 것을, 마지막 친구는 두 친구가 고르고 난 남은 것을 선택한다. 차례대로 허당인 사람, 현명한 사람, 착한 사람으로 명명할 수 있겠다.
애호박 덤이 붙은 호박을 산 친구는 그 속을 갈랐을 때 안이 다 썩었다고 했다. 따져가며 산 친구는 똑 소리 나는 살림꾼이긴 한데 인간미는 없다. 마지막 남은 것을 고른 이의 호박은 제일 작았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앞의 두 친구가 호박이라는 `물건`에 시선을 뒀다면 착한 친구는 타자라는`관계`에 눈길을 줬다.
자신보다 타자에게 선의의 시선이 먼저 가는 사람, 즉 착한 사람은 관계 지향적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세상의 온도는 생각보다 따뜻하지 않다. 착함의 숭고함이 평가절하 되는 나날일 것을 착한 사람들조차 느끼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착하다`고 말하면 그다지 반기는 것 같지가 않다. 착하다고 말하는 것이 결례일 정도로 `영리한 현명함`을 강요하는 사회는 아닌지. 착하기보다는 현명하기를 학습시키는 사회가 바른 것인지 헛갈리기만 한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