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삶과 죽음

등록일 2013-02-13 00:24 게재일 2013-02-13 18면
스크랩버튼
▲ 정석준 수필가

우리에게 죽음은 불안과 고통이며, 신비의 세계이다. 죽음, 그것은 영원한 소멸인가, 아니면 그것은 새로운 윤회의 시작으로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인가? 티벳트의 `바르도 퇴돌(死者의 書)`에서는 “인간아, 너는 너의 의사에 반하여 죽는구나. 죽음이 무엇인지 죽음을 배울지니라. 그러면 그대는 삶까지도 배우게 될 것이니라”고 말하며, 생이란 죽음에서 시작한다고 가르친다.

최근 사후세계를 다룬 `히어애프터(Hereafter)`란 영화를 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영화에서 죽음이란 주제를 다뤘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다.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살고,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소중한 삶의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해 사망한 정보기술(IT)의 거장 스티브 잡스는 “죽음은 인생에서 커다란 선택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덧없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겨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인간의 심층심리를 제5식·제6식(의식)·제7식(말나식)·제8식(아뢰야식)으로 구분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 중 제8식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아뢰야식이란 사람이 업(행위)을 지으면 그것이 하나도 소멸되지 않고 마치 곳간에 물건을 쌓아 놓듯 저장이 되는데, 이러한 업의 처소를 아뢰야식이라고 하며, 이것이 내생에 태어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미란다 왕문경`에서 대왕이 윤회에 대해서 묻자 나가세나 존자는“어떤 사람이 잘 익은 망고를 먹고 그 씨앗을 땅에 심었다고 합시다. 그 씨로부터 망고나무가 성장하여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다시 그 나무에 열린 망고를 따먹고 씨를 땅에 심으면, 다시 나무는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망고나무의 계속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윤회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불교에서는 내생을 믿고 행하는 행사로 49재를 들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죽음의 세계를 해매이게 되는데, 돌아가신 이에게 경전을 읽어줌으로써 망령이 지혜의 눈이 열려, 좋은 곳으로 환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이것이 인간의 궁극적 문제 해결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진여(眞如)의 세계를 대오각성(大悟覺性)하면 구름 걷힌 해와 같이 모든 상대적 갈등의 모순으로부터 벗어나 무차별한 평등의 세계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미혹된 중생들은 완전한 지혜의 눈을 뜨기 전까지는 자신이 지은 선악의 업력에 따라 천상·인간·축생 등 삼계육도(三界六道)에 윤회하는 철저한 인과응보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위대한 성현들은 삶의 연장으로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승찬대사는 법회하던 큰나무 밑에서 합장한 채 서서 입적했으며, 만공선사는 “나 이제 가야겠네”하며 허허 웃으며 입적했고, 인곡선사는 “오늘 떠나겠다”고 제자에게 말하자, 한 제자가 “내일이 백중명절이니 떠나시려면 내일 가시지요”라고 하자 선사는 “이날이 그날이고 그날이 이날이지 그런 삿된 생각은 말라”고 한 뒤 다음날 입적함으로써 죽음마저도 희롱해 버렸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고, 확장이고, 휘날레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삶의 의미를 믿는다. 또한 죽음의 의미를 믿는 자만이 삶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음은 삶에 속하기 때문이며 죽음 속에서 삶의 의미를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아침을열며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