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행복시대를 열겠습니다”는 외침이 아직 귓전에 맴돈다. 무엇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국민은 어디에서 행복을 맛보고자 하는가? 그 행복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상념에 빠진다.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에서 차동엽 신부는 황상민 교수의 조사(弔辭)를 전하며 “한국인은`돈=행복`이라는 공식의 포로가 되어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고 했다. 당대 미국 최대 부호였던 록펠러의 딸에게 어느 기자가 질문을 했다. “당신은 모든 여성이 부러워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행복하십니까?” 이에 “행복하다고요? 누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나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중에는 돈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든지 많아요. 나는 행복하지 못해요.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해주세요.”라고 록펠러의 딸은 대답을 했다.
돈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일까? 돈 보다 소중한 가치는 무엇일까? 우선적으로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려 살아온 시대가 있었다. 아직도 IMF 때보다 더 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렇다고 그것에만 매몰되어 살아간다면 놓치고 살아가는 그 무엇이 생기게 마련이다. 얼 쇼리스(Earl Shorris)는 `희망의 인문학(Riches for the Poor: The Clemente Course in the Humanities)`에서 먹고사는 것을 첫째에 두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를 가르치면서 우선순위를 과감히 뒤바꿔 버렸다.
먹고사는 것은 기본적이지만 그보다 `나 자신은 누구인가?`하는, 자신에 대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 김난도 교수는 어느 강좌에서 오늘날의 시대를 `유예된 시대`라고 했다. 곧 모든 것이 뒤로 미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지금 당장 공부에 취업에 몰두해 있으니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은 뒤로 미루어지는 것이다. 나아가 스마트시대로 칭할 수 있는 오늘날 그 스마트가 현기증이 날 만큼 속도에 매몰되게 해 존재의 성찰을 가로막고 있지 않은가 한다. 또한 필요로 하는 것보다 과잉 제공해 속절없이 귀중한 시간을 빼앗고 있지 않은가 한다. 최근의 어느 조사에서는 스마트시대에 오히려 책 읽기는 줄었다고 한다.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화면에 매몰돼 더 넓은 세상의 창을 열 수 있는 책 읽기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뒤로 미루어진 시대에 더욱 안타깝게 하는 일이다. 속도의 보드에서 내려서고, 작은 화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말에 멈추어 본다. 스파르타의 왕이자 헬레네의 남편인 메넬라오스는 원천, 출발점에로 회귀해 현재와 씨름하는 악전고투 끝에 자신의 미래를 향한 항해를 시작할 수 있었다.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당선인의 굳은 의지를 의심하는 바 아니다. 두터운 중산층을 이루겠다는 그 뜻, 꼭 성취했으면 한다. 단지 경제적 측면으로만 국민행복시대를 이루기 위한 접근법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각자의 자아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할 때, 사람의 생존은 빵만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기에 월리암 글라써(William Glasser)의 이론도 적용할 필요가 있겠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다양한 욕구를 현실에서 충족할 때 행복해진다고 했다. 그 다양한 욕구는 먼저 소속과 사랑의 욕구이다. 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다양한 공동체에 참여해 활동함으로써 오는 행복이다. 둘째 힘과 성취의 욕구이다. 이 욕구를 충족하되 그 힘을 이웃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주어지는 행복과 그 누군가를 위한 자원봉사자처럼 비교 경쟁 없는 자발성을 발휘함으로써 얻어지는 삶의 행복이다. 셋째 자유의 욕구이다. 이 욕구를 충족하되 책임이 동반되고, 타인의 욕구를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성숙한 사회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즐거움의 욕구이다. 재밌게 신나게 살아감으로써 함께 행복을 누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