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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그컵 철학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3-01-10 00:06 게재일 2013-01-1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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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을 때 그 주체와 대상은 오직 `나`에 관한 것이었다. 서구의 전통적 존재론을 대표하는 이 명제는 모든 생각을 `나`란 인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전제한다. 그 사유 안에는 타자가 끼어들 틈은 없다. 내 문제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타자를 신경 쓸 여력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런 생각에 몰두하느라 타자로까지 사유 영역을 넓히지는 못했다.

이러한 자아 귀환형 외곬 사유가 전체주의를 낳았다고 철학자 레비나스는 말한다. 편협한 전체성을 낳는 자아와는 별개로, 타자는 운명적으로 무한자유를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전체와 무한`이란 개념으로 정리했다. 타자의 무한성은 결코 나의 카테고리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나의 바깥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그 타자를 나비 잡듯이 내 손아귀에 넣겠다는 그 지점에서 세계관은 충돌한다.

사소한 예를 들어보자. 지인의 집들이 선물로 영국제 찻잔을 사들고 간다 치자. 그 집의 주방엔 사은품으로 받았음직한 머그컵이 종류별로 정돈되어 있다. 사은품 회사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그 머그컵이 우아하거나 고급스러울 리는 없다. 하지만 실용적이고 깔끔해 집주인은 그 컵을 애용한다. 한데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 온 찻잔으로 바꿔. 하기야 이 유명 브랜드 찻잔을 알기나 하겠어?

이 경우 영국제 찻잔의 우위성에 점수를 주는 `나`의 전체성은 사은품 머그컵을 애용하는`타자`의 무한성을 침범한 경우가 되겠다. 생활수준이 비슷하다면 브랜드 찻잔과 실용성 머그컵 사이는 취향의 차이 딱 그만큼이다. 한데 존재론적 전체성에 함몰된 우리는 내 영역 밖의 타자에게 내 식으로 문화 코드를 바꾸라고 충고하고 무시한다. 엄연한 폭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윤리성을 강조한 것은 눈여겨볼만하다. 그에 의하면 윤리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 물론 여기서 윤리란 타자 앞에서 갖춰야 할 `나`의 도덕관을 말하는 것이다.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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