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자아 귀환형 외곬 사유가 전체주의를 낳았다고 철학자 레비나스는 말한다. 편협한 전체성을 낳는 자아와는 별개로, 타자는 운명적으로 무한자유를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전체와 무한`이란 개념으로 정리했다. 타자의 무한성은 결코 나의 카테고리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나의 바깥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그 타자를 나비 잡듯이 내 손아귀에 넣겠다는 그 지점에서 세계관은 충돌한다.
사소한 예를 들어보자. 지인의 집들이 선물로 영국제 찻잔을 사들고 간다 치자. 그 집의 주방엔 사은품으로 받았음직한 머그컵이 종류별로 정돈되어 있다. 사은품 회사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그 머그컵이 우아하거나 고급스러울 리는 없다. 하지만 실용적이고 깔끔해 집주인은 그 컵을 애용한다. 한데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 온 찻잔으로 바꿔. 하기야 이 유명 브랜드 찻잔을 알기나 하겠어?
이 경우 영국제 찻잔의 우위성에 점수를 주는 `나`의 전체성은 사은품 머그컵을 애용하는`타자`의 무한성을 침범한 경우가 되겠다. 생활수준이 비슷하다면 브랜드 찻잔과 실용성 머그컵 사이는 취향의 차이 딱 그만큼이다. 한데 존재론적 전체성에 함몰된 우리는 내 영역 밖의 타자에게 내 식으로 문화 코드를 바꾸라고 충고하고 무시한다. 엄연한 폭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윤리성을 강조한 것은 눈여겨볼만하다. 그에 의하면 윤리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 물론 여기서 윤리란 타자 앞에서 갖춰야 할 `나`의 도덕관을 말하는 것이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