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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랑과 이랑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2-12-26 02:37 게재일 2012-12-2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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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쓴 텃밭이란 제목의 글을 합평하는 자리에서였다. 평소 글을 잘 쓰시는 분이라 글 자체에 대해서 조언을 할 만한 것은 크게 없었다. 오히려 좋은 글을 계기로 농사 관련 단어 몇 개를 확실하게 알게 되어서 유익한 날이었다.

먼저 `사래`라는 말의 정확한 뜻이 궁금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남구만의 그 유명한 시조에 나오는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할 때 나오는 그 말이다. 앉은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한다. `이랑의 길이`나 `이랑의 옛말`을 일컫는단다.`사래 긴 밭`이란 관용구가 예문으로 쓰이는 걸로 보아 `사래`는 이랑이 좀 길 때 활용할 수 있는 낱말이란 걸 알겠다.

그 다음 자연스럽게 `이랑`과 `고랑`에 대한 차례가 되었다. 차고 넘치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개념이 확실히 잡히지 않던 용어였다. 이랑은 `고랑 사이에 흙을 높게 올려서 만든 두둑`을 일컫는 말이고, 고랑은 `두둑한 땅 사이에 길고 좁게 들어간 곳, 이랑에 상대한 말`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제야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해풍에 일렁이던 보리밭에도, 무서리 맞으며 단단해지던 배추밭에도 이랑과 고랑은 있었다. 다만 농사를 모르니 한 번도 그걸 의식해본 적이 없었을 뿐. 배수와 통풍의 길인 고랑이 없다면 씨앗과 열매의 길인 이랑도 보장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농사라면 고랑 없는 이랑도, 이랑 없는 고랑도 없다. 둘이 맞물려야 수확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처한 상황이 고랑이라고 의기소침할 일도, 이랑이라고 의기양양할 일도 아니다. 이듬해 이른 봄, 밭갈이 한 번이면 기왕의 이랑과 고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새로운 이랑과 고랑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현명한 조상들은 이런 속담을 남기지 않았던가. `고랑도 이랑 될 날 있다.`고.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고. 이 한 밤, 이랑 드높이기 위해 저마다의 고랑에서 숭고한 호미질을 하고 있을 모든 이에게 평화가!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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