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나라` 그리스 기행 <br>⑥코린트 운하와 방탕의 도시 `코린트 성채`
행복했던 이틀간의 산토리니에서 아테네로 돌아온 다음날이다. 오늘의 첫 번째 관광은 코린트 운하다. 코린트로 가는 도중 `메가라`란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천년의 흐름 속에 한 계절이 지나듯 자동차로 후딱 지난 곳이지만 메가라는 철학사에서 빛나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소피스트 철학자 에우클레이데스(BC 450~380)가 메가라 철학 학파를 창설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즉 `A이지 A는 아니다.`와 같은 명제논리학(命題論理學)을 창시한 학파로 스토아학파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 지역이다.
요즘 메가라는 아테네 변방 도시로 농사와 양계를 많이 하는 농촌 마을이다.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을 출발한 지 한 시간 지나 코린트 운하에 도착했다.
운하(運河)는 물길이다. 바다와 바다, 바다와 강, 강과 강을 이어 만든 물길. 그 길을 통해 인간은 빠름을 꿈꿨다. 세계 최대의 운하는 162.5km의 수에즈 운하다.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와 인도양을 잇고 있다. 82km의 파나마 운하는 카리브 해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다. 이런 운하에 비하면 코린트 운하는 그 길이와 폭이 짧다. 운하 위로 놓인 다리 한쪽 전망대에서 양쪽 끝을 볼 수 있다.
코린트 운하는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한 바퀴 돌지 않고 남 그리스 에게 해와 이오니아 해(코린트만과 사로니카만)을 연결해 아테네에서 이탈리아 방면으로 빨리 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총 길이 6.3km(6천343m)의 바닷길이다. 평균 높이는 80m이고 폭은 24m다.
운하 위에 놓인 다리 전망대에서 짙푸른 운하를 내려본다. 양옆으로 가파른 절벽 바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6.3km를 뚫으면서 300km의 먼 길을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빨리 가고 싶은 바람은 기원전에도 있었다. 한 눈으로 봐도 빤히 보이는 지름길이 있는데 돌아서 가야 한다니……. 거센 태풍의 바다를 거치지 않고 배를 뭍으로 끌어올려 반대편 바다까지 끌고 간 일도 있었다. 그것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서 가는 것보다 시간과 경비를 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AD 67년 로마의 네로 황제는 노예 6천명을 동원해 운하를 뚫기 위해 삽을 들었다. 하지만 운하를 시작한 다음 해 죽게 되자 그 뒤를 이은 갈바(Galba) 황제는 경비 문제로 사업을 중지시켰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1881년 다시 시작해 1893년 완공하게 됐다.
운하를 구경한 우리는 곳에서 7km 떨어진 해발 575m의 아크로코린트(Acrocolinth) 성으로 향했다. 아크로(Acro)란 높은 곳을 가리킨다.
가파른 산길 아크로코린트 성문을 지나자 성채 밖으로 인구 3만의 코린트 마을이 펼쳐진다. 코린트는 기원전 5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기원전 8세기에는 25만 정도의 인구가 머문 거대 상업 도시로 발전했다. 기원전 27년 아카이아(펠로폰네소스 반도) 속주 총독부로 승격되면서 그리스인, 로마인, 유대인, 동양인 등 여러 인종이 어울리는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사도 바오로의 서간 코린트 전서에서 보듯 타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 도시다.
산꼭대기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제관(무녀)의 여자들이 천 명 이상 있었다. 그들 중에는 산 밑의 사내들과 불륜을 밥먹듯이 저지르고 그것도 부자(父子)를 끼고 노는 무녀도 있었다. 에페소에서 그런 소식을 접한 사도 바오로가 코린트 사람을 향해 쓴 편지가 코린트 전서다.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18:11)
바오로 사도가 코린트에 머문 기간은 기원후 51년, 52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성지 순례로 찾는 곳이 코린트다. 코린트는 후일 지진에 의해 황폐화된다. 아크로코린트(Acrocolinth) 성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아랫마을도 내려본 우리는 코린트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내려가는 도중 최 형이 코린트의 `피레네의 샘`에 얽힌 신화를 들려준다.
“피레네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잘못 날아온 원반에 그 아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죠. 자식을 잃은 피레네는 밤낮 눈물로 세월을 보냈어요. 눈물이 몸을 녹여 마르지 않는 샘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그곳을 `피레네 샘`이라고 하죠.”
유적(遺蹟)을 담으로 사용하고 있는 낡은 집 옆길을 지나자 박물관이다. 코린트 박물관은 1931년에서 1932년까지 미국 고고학자 스튜어트 톰슨에 의해 지어졌으면 1950년 현재의 규모로 확장했다.
그리스의 다른 박물관처럼 실내 박물관과 외부로 나누어 관람할 수 있는데 실내 박물관에는 선사시대부터 비잔틴시대까지의 유물이 있다.
표를 끊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의 방이 나온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죽은 사람을 소생시킬 정도로 뛰어난 의술의 신이다. 환자를 치료하면 그 환자는 나은 부분을 작은 조각품으로 만들어 기증했다. 여자의 젖가슴은 물론이거니와 남성의 성기 등 신체의 많은 부위가 전시돼 있다. 그만큼 성생활의 문란으로 질병이 창궐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귀와 발도 그 크기가 다양하다.
단층의 박물관에는 4개의 방으로 분야별로 유물을 전시해 놓았는데 어수선할 정도로 작품이 많다. 네로 황제의 두상을 비롯하여, 니케의 여신상, 청동거울, 포도넝쿨 부조, 도자기, 유리공예, 가면, 방패, 조각상 등 다양하다. 하물며 석관에 사람의 유골도 보인다.
나의 눈을 특별히 끌어당긴 것은 비잔틴 시대에 만든 모자이크다. 술의 신이며 제우스의 아들 디오니소스를 위한 모자이크다. 원근법에 따른 입체적 느낌이 드는데 네 장의 꽃잎을 펼쳐놓은 듯 섬세하게 만들었다. 바닥에 깔렸던 것을 벽에 걸어 놓은 것이란다.
실내 박물관 전시물을 이쪽저쪽 둘러보고 밖으로 나갔다. 넓은 공터 곳곳이 역사의 한 갈림길에서 코린트의 위용을 보여주던 건물 자리다. 기원전 6세기에 제작된 대표적 건물 아폴론 신전을 왼편으로 두고 시계 방향으로 걷는다.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탐방로 양 옆으로 돌들은 누워있다. 성한 것보다 깨져서 마모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 사이에 올리브도 자라고 소나무도 자란다.
산쪽(아크로코린트)으로 기둥 세 개가 있다. 로마제국의 황제 옥타비아누스 신전이다. 나머지 부분은 다 무너지고 달랑 기둥 세 개가 하늘을 받치고 있다. 학술, 문예를 장려해 로마 문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그였다. 로마의 초대 황제(BC 63~AD 14) 카이사르의 양자로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이차 삼두 정치도 시행했던 인물이다.
아고라(Agora) 옆길로 관공서가 자리잡고 또 술집터도 있다. 사람 사는 모습이 시대를 초월해 다 비슷비슷함을 발견하게 된다. 레카이온 거리 끝 연단(베마)은 총독이나 관리가 연설을 하던 곳이다. 기독교 신자들에게 이곳은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로마 총독 갈리오가 이곳에서 바오로 사도를 심문했기 때문이다. (사도 18: 12-17)
이동하면서 최 형이 들려주었던 `피레네 샘`도 보고 목욕탕, 수세식 공중화장실도 만난다. 아폴론 신전으로 향했다. 아폴론 신전은 원래 38개의 기둥이었는데 현재 7개밖에 남아 있지 않다. 잦은 지진과 훼손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 많은 유물을 제자리에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많기 때문에 흔한 유물이고, 그렇기에 별로 소중해 보이지도 않은 느낌이다. 흩어진 유물을 낡은 시대의 지폐처럼 멍하니 바라본다. 멍한 시간 안으로 수천 년이 햇살처럼 촘촘 스미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