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가토` 창비 펴냄, 권여선 지음, 432쪽
소설가 권여선(48)은 기억에 대한 집요한 탐색을 통해 인간관계의 미세한 균열과 그로 인해 부각되는 일상의 이면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데 탁월한 솜씨를 지닌 작가다. 첫 장편과 세권의 소설집을 통해 그가 보여준 그 서늘하고 씁쓸한 생의 진실과 마주한 독자와 평자들은 권여선이라는 이름을 한국문학의 한 특출한 성취로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등단 이후 15년 만에 두번째 장편소설 `레가토`(창비)를 써냈다. 작가의 등단작이 장편인 점을 감안하면 창비문학블로그 `창문`에 연재한 이 작품이야말로 작가로서 첫 연재작이자 본격적인 첫 장편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생생한 인물 형상화와 감탄을 자아내는 단단하고 선명한 문장,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신랄하면서도 담담한 포착 등 단편들에서 보여준 그만의 매력이 집대성된, 권여선 소설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작품이다.
`레가토`는 삼십여년 전, `카타콤`이라 불리던 반지하 써클룸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보낸 인물들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당시 써클 회장이었던 박인하는 지금은 중년의 유명 정치인이 돼 있고 그 시절 철없던 신입생들은 현재 출판기획사 사장, 국문학과 교수, 국회의원 보좌관 등으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어느날 영문을 알 수 없이 실종된 동기 오정연에 대한 기억이 깊은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런 그들 앞에 어느날 오정연의 동생이라는 하연이 나타나 언니의 흔적을 수소문하면서 그들의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이 서로 얽히고 이어지기 시작한다.
소설은 각 장마다 현재와 과거의 시점을 오가며 그들의 젊은 날과 현재의 삶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진행된다. 엄혹한 시절, 학기 초 첫 `피쎄일`의 경험을 시작으로 여름의 농활과 합숙, 가을의 첫 데모를 거치며 운동권이 되는 절차를 밟아가던 그들의 청춘은 한편으로 순진하고 열정적이고 한편으로 서툴고 어리석고 맹목적인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반면 인생의 격동기를 지난 현재의 그들은 언뜻 세속적이고 안정된 삶에 접어든 듯 보이지만 여전히 젊은 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끌어안고 있거나 애써 잊으며 살아가고 있다. 과거는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죄의식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애써 환기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든 치명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 다른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 과거를 호출한다.
소설의 제목인 `레가토`는 악보에서 음과 음 사이를 이어서 부드럽게 연주할 것을 지시하는 음악 용어다. 그것은 이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를 `끊지 말고 이어서` 읽어달라는 주문으로 읽힌다. 누구에게나 잃어버렸는지도 모른 채 잃어버린 것이 있다. 그것들로 이루어진 것이 현재라는 시간이고 그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어긋난 관계들의 종합이 한 사람을 이룬다. 권여선 표 `기억 서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인생이란 결국 그것을 발견해내는가 발견해내지 못하는가이다.
/윤희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