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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四季와도 닮은 어머니의 일상과 인생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2-05-04 21:12 게재일 2012-05-0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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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어머니` 문학동네 펴냄, 김용택 지음, 256쪽
▲ 김용택 시인. 산문집 `김용택의 어머니`는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땅과 벗하고 살아온 어머니 박덕성 여사의 일생을 정리했다.

오는 10월 등단 30주년을 맞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64)이 그간 한 인물에게서 시를 베껴 썼노라 고백했다.

그가 자기 시의 원 주인이자 시원(始原)으로 꼽은 인물은, 바로 어머니. 실은 김용택의 어머니 `양글이 양반`은 이미 문단 안팎에서 입심 좋고, 삶과 생명에 대한 혜안을 지닌 `문맹의 시인`으로 입소문 짜했던 터다.

김용택은 지금까지 어머니에 관해 시로, 인터뷰로, 산문 속 일화로 간간이 풀어놓긴 했지만, 책 한 권에 온전히 어머니 이야기를 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어느덧 팔순이 넘은 노모의 인생을 처음부터 고스란히 복원해보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으로 산문집`김용택의 어머니`(문학동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 김용택은 신경림 시인도 무릎을 `탁!` 쳤다는 `용택이 엄마` 양글이 양반의 걸출한 입담과 삶의 흔적들을 담는 한편, 그간 생의 고비마다 어머니를 떠올리며 썼던 시들, 또한 `어머니에 관한 자그마한 사건기록`이라 할 만한 일기문까지를 한데 모았다. 또한 사진작가 황헌만이 눈부신 섬진강 마을의 사계 속에서 걷고 일하고 이웃들과 노니는 어머니를 계절별로 밀착 촬영한 사진들도 함께 실었다.

꽃다운 처녀가 시집와서 한 집안의 새댁이 되어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자녀를 낳아 수확하고 마른나무처럼 늙어가는 일생의 여정은, 마치 자연의 사계와도 닮았다. 이 책은 `제1부 봄―봄처녀, 섬진강에 시집오셨네`에서부터 `제4부 겨울―마른나무처럼, 어머니 늙어가시네`에 이르기까지 계절의 흐름을 따라 어머니의 일상과 인생을 좇는다.

몸집이 작고 야무지다고 해서 본명보다 `양글이`로 더 많이 불렸던 처녀가 있다. 장차 시어머니 될 사람이 선을 보러 온 자리에서 야무지게 물을 떠다 드리고 얌전하게 뒷걸음질로 물러나 단번에 며느릿감으로 낙점받은 양글이 처녀. 방년 18세 때 꽃가마 타고 섬진강으로 시집온 이후, 호랑이 시어머니에게 눈물 빼며 시집살이를 하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지만 그 아들은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고 오리를 기르겠다고 나섰다가 살림만 폭삭 말아먹는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시인이 되면서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섬진강으로 끌어들이니, 그이가 바로 시인 김용택이다.

하지만 김용택이 어머니의 가슴을 새카맣게 태우고 온 가족이 빈궁한 살림살이 속에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원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 어느 날 학교 기성회비를 내지 않아 집으로 돌려보내진 고등학생 김용택. 내일 꼭 내겠노라, 한 번만 봐달라 말도 못 한 숙맥 아들이 평일 대낮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꼴을 본 어머니는, 곧장 닭장에 남아 있던 영계를 쥐잡아 망태에 넣고 장에 나가 내다 판다. 한데 어떡하나. 닭 판 돈은 기성회비와 그 돈을 쥐고 김용택이 학교로 돌아갈 차비에나 빠듯이 들어맞고, 어머니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차비는 없다.

“어매는 어치고 헐라고?”

“나는 걸어갈란다.”

어머니는 빈 망태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고 서 있었다.

“차 간다. 어서 가거라.”

김용택의 어머니는 언제나 아들에게 마지막 남은 것 하나까지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러다보니 가진 것 없어 챙겨주지 못한 다른 자식들에 대한 회한은 깊디깊다. 본인도 생전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본 여성이기에, 딸이라는 이유로 학업을 중도 포기하게 한 딸 복숙이에 대한 안쓰러움과 미안함은 오죽했을까. 또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고 집안 형편을 생각해 군말 없이 생활전선에 나선 누이의 슬픔도 김용택의 가슴엔 고스란히 눈물겨운 풍경으로 맺혀 있다.

어찌 서러운 일이 이뿐일까. 그 숱한 슬픔과 인생의 고비를 넘어 자식들을 길러내고 수굿이 노년에 이른 어머니의 삶에 그는 경탄한다. 분노와 미움과 절망과 갈등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어쩌겠냐. 사는 게 다 굽이 고비가 있고 살아갈수록 걱정은 쌓여가고 근심은 깊어지는 게 사는 것인데, 뭔 일 있으면 저러다가 또 살겠지 한다”며 세상사에 부대낀 자식들의 등을 가만가만 뚜드려주는 어머니의 위로와 수긍은 그에게 한 편의 맑은 시다.

어느덧 그 자신도 환갑이 넘은 노인이 됐으나, 그는 여전히 궁금하다. 우리네 어머니는 어떻게 저런 경지에 이르렀을까. 우리 자식들의 등은 어머니가 두드려주고 다친 가슴은 어머니가 어루만져줬다지만, 지친 어머니의 등은 과연 누가 두드려주었을까.

어머니의 친구는 누구였을까. 살면서 속이 썩고 하늘을 찌르는 분노가 어머니에겐들 왜 없었을까.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은 일이 왜 없었을까.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디다가 화풀이하고 무엇을 잡고 사정하며 어떻게 그 순간을 이겨냈을까.

어느 날 어머니가 들에 가셔서 해 저물 때까지 오지 않았다. 달빛 아래 어디선가 호미 소리가 들렸다. 밭 끝 저쪽에 어머니가 부지런히 밭을 매고 있었다. 몸짓이 격렬해 보였다.

이 책에는 그렇게 땅과 벗하고 흙을 갈아엎으며 생각을 정리했던 어머니의 일생이, 자연의 흐름과 농가의 한해살이와 함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귀가 멀어 이제 자식들이 도란도란 건네는 이야기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 어머니. 김용택과 그의 아내는 어머니의 늙음을 설워하며 울음을 삼키지만, 이제 어머니에겐 그 울음소리 조차 제대로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가슴 아파 보청기를 해드리겠다는 자식들의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늙으면 세상 소리 다 들을 필요 없다”

시와 글, 사진으로 어머니 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김용택의 어머니`는 사라져가는 우리 농촌의 풍광과 늙어가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헌사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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