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시인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절제된 시어로 간결하고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는 장씨는 2년 만에 펴낸 새 시집에서 비움과 느림의 삶을 추구한다.
절제된 시어로 엮어낸 시들에는 고요한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스님의 나지막한 법문 소리처럼 맑은 울림이 있다.
“저물면 아무도 없는 데로 가자
가도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고요의 눈망울 속에 묻어둔
보석의 살들-이마 눈 코
깨물던 어깨,
점이 번진 젖, 따뜻한 꽃까지 다 어루어서
잠시 골라 앉은 바윗돌아 좀 무겁느냐?
그렇게 청매빛으로다가 저문다
결국 모과는 상해버렸다”
-`저물녘-모과의 일`전문
버릴수록 가져지고 지울수록 선명해지는 게 세상살이의 이치라면 장석남의 시는 이미 그 일가를 이루었을 터, 이번 그의 시집은 작고 더 작아져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고요`라는 구멍 속에서 홀로이 노는 한 사내를 만나게끔 한다. 무쇠 솥을 사 몰고 올 때, 그것을 꽃처럼 무겁다 할 때, 그 속에 쌀과 수수와 보리를 섞어 안친 밥을 지어 우리들을 부를 때, 그를 어찌 시라 아니할까. 시로 그리 생겨먹은 것을.
그가 가진 특유의 섬세함과 유연성을 가장 정점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자부하는 60편의 시가 3부로 나누어 담긴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강박적이리만치 열과 행을 꽤나 조여서는 더는 뺄 것도, 더는 넣을 것도 없이 콤팩트한 시를 우리 앞에 선보이고 있다. “하나 둘 셋 넷 다서 여서 일굽 일굽 일굽” 하듯 그만의 특유한 말법도 살아 있으려니와 두 줄 할 것을 한 줄로, 한 줄 할 것을 한 단어로 찍어버리는 데 선수가 되어버린 그는 말을 지우는 데 더 큰 말의 그림자가 드리운다는 것을 알아버린 연유로 이렇게 씨 뿌리듯 툭툭 시를 뱉는다. 손으로 쓰는 시 그 너머에 입으로 부는 시라니. “아무 보는 이 없이 피는 꽃이 더 짙은 까닭은 아무 보는 이 없기 때문”(`물과 빛과 집을 짓는다`)이란 말인가.
이른바 더, 더, 가 아니라 덜, 덜, 을 향해 가는 비움과 침묵 속 여백과 공기의 팽팽함, 그로 풍만해지는 마음의 빈자리에 더욱이 아무나 앉히는 것은 결코 아닌 채로 시인은 빈 의자를 내놓는다. 그 일에 한생을 내걸 정도로 의자 따위에 작심을 하기도 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문학동네 펴냄, 116쪽, 8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