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비슷한 모양이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탕이 제법 붐볐다. 대충 몸을 씻고 탕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서히 몸이 불으면서 생각도 붇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문득 오래전 아버지가 쭈글쭈글 떠올랐다.
송도사거리 부근에 대광탕이란 곳에서 아버지는 보일러실을 도맡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2시에 집을 나섰고 아무도 없는 보일러실에 홀로 쭈그리고 앉아 불을 지폈다. 새벽 4시에 뜨거운 물을 탕으로 흘려보내며 아버지는 새참을 드셨고, 온종일 목욕탕 뒤편 보일러실을 지키고 있었다.
아직도 아버지가 있던 보일러실을 기억한다. 악취 나던 샛강 바로 옆 어둡고 외롭던 아버지의 보일러실. 그때 아버지는 보일러 속의 불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보일러실 김 씨 아들이라고 공짜목욕을 수없이 하면서도 그것이 부끄러웠던가, 어쨌던가. 가끔 보일러실에 들러 용돈이나 챙기던 아들을 좀 더 붙잡아두려고 당신은 입에 대지도 않던 과자를 그렇게 많이 사두었던가 어쨌던가. 그때…. 아버지도 어쩌면 외로웠을 테지…. 하마터면 새해 첫날부터 욕탕에 앉아 눈물 글썽일번 했지만, 세신(洗身)이 날 살렸다. 욕탕 구석에 붙은 `세신 1만3천원`에 그만 평정을 되찾은 것이다.
한국표준 직업분류코드 41223, 공식 명칭은 목욕관리사, 일명 때밀이가 `세신`으로 표기돼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다. 1만3천원과 한자표기가 없었다면 목욕탕 주인의 새해 덕담인가 했을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미 `세신`이라는 말은 보증금 얼마에 월 얼마라는 식으로 벼룩시장이나 구인시장에서는 곧잘 통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만난 세신이 내겐 여간 의미심장한 게 아니었다. 사실 우리에겐 막연한 수신(修身)보다 구체적인 세신(洗身)이 더 절실하다.
이제 두루뭉수리 한 것은 안 된다. 이태리 타올로 박박 밀 수 있어야 한다. 꼬리나 깃털이 아니라 몸통이어야 한다. 때가 몽글몽글 밀려 나오는 몸을 씻어야 한다. 뱃가죽을 어깻죽지를 목덜미를 꼼꼼하게 밀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오욕(汚辱)의 때를 벗고 쇄신(刷新)할 수 있다.
새해 아침부터 파열음을 내고 있는 한나라당과 공천갈등을 빚고 있는 민주통합당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진다.
이들은 말을 쇼를 이미지를 닦아 재탕할 뿐 제 몸은 씻지 않는다. 세신(洗身) 하지 않으면 쇄신(刷新)은커녕 세신(世臣)도 어렵다.
지난 1월3일 한 일간지에서 “총선, 현역의원 절반 이상 바꿔야”라는 기사를 보면 이제 여당의 텃밭이라는 대구·경북에서도 세신(世臣)은 끝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나라당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등식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표출된 것이다. 지역민의 절반 이상이 한나라당 공천을 받더라도 뽑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이 52.8%나 나왔다.
세신(洗身)과 쇄신(刷新), 세신(世臣)으로 4월 총선을 가늠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겠다.
누가 제 알몸을 드러낼 것인가, 어떻게 프라이팬을 통째로 바꿀 것인가, 어디서 세신이 죽고 새로 태어날 것인가.
비단 정치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변화무쌍한 임진년, 세신(洗身)과 쇄신(刷新), 세신(世臣)의 의미를 잘 헤아려 독자 여러분도 비상과 승천의 한 해가 되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