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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신분증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2-01-12 23:17 게재일 2012-01-1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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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최근에 두 개의 신분증을 잃어버렸다. 원래 정신이 없고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법을 모르는 탓에 집안 어딘가에 잘 모셔져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필요한 때 없으니 잃어버린 건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는 교원 신분증이고 다른 하나는 여권이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가 모두 눈에 보이지 않으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나는 본래 집착이 많은 사람이어서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만사 젖혀놓고 그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건에 대해서도 큰 물건 탐내는 벽은 없지만 당장 없어도 되는 것, 여행지에서 사온 것, 어딘가 스타일이 좋아 보여 아끼는 것 따위가 없어지면 내 어딘가가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공허감에 시달리면서 자꾸 생각이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

이번에 신분증 사건도 그런 경우다. 당장 신분증이 없어졌다고 해서 벌금을 내라는 곳도 없고 신분증 조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다. 그렇건만 잃어버린 신분증 생각에 책을 읽다가도, 글을 쓰다가도,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그거 어디 갔지?, 하고 마음속 생각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 두 개 신분증이 내게 무슨 관계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교원 신분증은 왜 내가 그렇게 찾고 있나? 그것은 국립대학 교원 신분증이다. 며칠 전에 이 대학은 국립대학에서 국립대학법인이라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나는 법인 소속 교원이지 국가 소속 교원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잃어버린 신분증은 그 며칠 전까지의 나의 세속적 위치를 표현해 주던 것이다.

그럼 여권은 어떤가? 한 보름쯤 후에 나는 여행을 하게 된다. 그걸 위해서는 여권이 필요하고, 그게 없으면 여권을 새로 발급받아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 생기게 된다. 사진도 찍고 구청에도 가고 또 신청을 한 후에 여러 날을 기다려 찾으러 가야 하는 절차를 다시 치러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고 나니, 이 두 개 신분증은 지금 내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에서만큼은 같지만 그 잃어버린 것의 성격은 결코 같지 않았다. 하나는 옛날의 나 자신의 세속적 위치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것일 뿐 현재나 미래를 살아가는데 이게 없어서 큰 탈이 날 일은 없었다. 교원 신분을 증명해 줄 신분증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대학본부에 가서 새로운 신분증을 발급 받으면 그만이다. 그런 것을 나는 꼭 그 신분증이 필요해서 여러 날을 들여 마음을 쓰고 쓰고 하는 것이다.

반면에 여권은 바로 얼마 후에 내가 치러내야 할 여행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없으면 안 되는 것이고, 원래 내가 갖고 다니던 여권이 아니라도 내 사진이 들어간 다른 여권을 발급받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자 잃어버린 두 개의 신분증에 대한 내 집착의 성질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또 그러자 이 두 개의 신분증에 대해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신분증에 대해서는 그 신분증이 표현하고 있는 과거의 내 신분에 대한 집착을 먼저 버려야 했다. 그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고 앞으로의 나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일`을 상기시키는 소도구일 뿐이다. 두 번째 신분증에 대해서는 그것이 필요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 없으면 새로 발급받으면 그만이었다. 꼭 그 신분증이 내게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어차피 두 개의 신분증이 모두 그것 자체로 나 자신인 것은 아니며, 내가 이 세상에 짊어지고 나온 것도 아니다. 두 개의 신분증이 모두 나 자신을 근원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님을 깨달을 때, `나`는 헛된 명리에 대한 집착으로부터도, 국가라는 이름의 명령적 당위로부터도 어떤 간격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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