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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만 젊으면 쇄신되나?

이경우 기자
등록일 2012-01-09 23:23 게재일 2012-01-09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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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우편집국장
포에니 전쟁이 끝난 기원전 146년의 로마. 공포의 한니발을 꺾고 카르타고에 소금까지 뿌렸다. 승전에 따른 전리품과 획득한 노예로 로마 귀족들의 삶은 윤택해 졌으나 120년에 걸친 전쟁으로 민중의 삶은 오히려 더욱 피폐해졌다. 평화는 국내에 계층간 불만과 갈등을 가져 온 것이다. 이를 부수고자 나선 인물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다. 아버지는 집정관을 지낸 티베리우스 샘프로니우스 그라쿠스였고 어머니는 포에니 전쟁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코르넬리아였다.

귀족 출신인 그라쿠스 형제는 호민관이 되어 가진 자들의 토지를 빼앗아 평민들에게 나누어주는 토지 개혁 작업과 빈민 구제 사업을 벌인다. 개인의 토지 소유 한도를 정하고 자작농을 육성해서 평민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원로원의 반대로 실패한다. 그냥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30세의 형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살해당한다. 동생 가이우스는 공공의 적으로 몰려 33살에 자살을 강요당한다. 형제 모두 무덤도 없이 테베강에 시체가 버려진다. 기득권은 그렇게 철옹성이었다.

1884년 조선. 33살의 청년 김옥균 등 개화파는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혁명을 꿈꾼다. 그들의 꿈은 청나라의 사대에서 벗어나 독립 근대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21살의 청년 서재필이 이끄는 개화파의 행동대는 민태호를 단칼에 척살하는 등 민씨 세력들을 축출한다. 이들은 청나라에 조공을 폐지하고 평등권을 주장하는 등 성공한 듯 보이던 정변은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난다. 조선 정부는 이 사건을 역모로 규정하고 주모자는 대역죄인으로 몰려 가족이 몰살당하거나 해외로 망명을 가야 했다. 미국으로 달아나서 10여년 뒤 의사가 돼 돌아온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만들고 자주독립을 외칠 때 뜻을 같이하고 독립운동에 동참한 청년 이승만은 22살이었다.

2012년 대한민국. 선거의 해가 시작되자마자 여당 야당 가릴 것 없이 국민을 상대로 환심 사기 경쟁에 들어갔다. 특히 지난 해 10·26 보궐선거에서 뜨거운 민심을 확인한 정치권의 긴장도는 예전에 없이 심각하다. 비상대책위원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한나라당은 박근혜 위원장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 놓겠다”고 선언했다. 정치권은 박 위원장이 당 쇄신을 위해서 내려 놓겠다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놓고 설왕설래다. 공천권이라거나 지역구 불출마라는 등.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키 워드는 쇄신이다. 2천여년 전 로마에서도 있었고 127년 전 조선에서도 있었다. 인적 쇄신을 강조하면서 제도 뿐 아니라 나이 자체가 혁파해야 할 상대가 돼 버렸다.

그러나 정작 놓치는 것이 있다. 로마에서 그라쿠스 형제가 개혁에 실패한 것도, 조선말 개화당의 꿈이 3일 천하로 끝난 것도 모두 기득권의 반대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물론 그 주역이 젊은 20대 30대였지만 단지 그들의 등장 자체가 쇄신은 아니다. 비록 젊은 그들의 혁명은 실패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열정과 정책이 혁명이었음을 역사가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은식이 그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제1장을 `갑신독립당의 혁명 실패`로부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최초의 움직임에 대한 예우이자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대해 무게를 실었다는 증거다.

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물갈이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쇄신은 나이가 아니라 인물 자체의 의지이고 그 뜻이 혁명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득권은 그냥 내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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