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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전 의원의 죽음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2-01-05 23:21 게재일 2012-01-0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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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지난 30일 김근태 전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파킨슨 씨 병을 앓고 있었고 뇌정맥혈전증 역시 고문 후유증으로 추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몸이 안치되어 있는 서울대병원을 찾았던 것 같다. 그의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성품이 잘 알려져 있어서 그런지 문학계에서도 그를 직접 찾아 추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30일 새벽에 눈이 떠졌다. 요즘엔 스마트폰이 발달한 때문인지 일어나자마자 뉴스를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는 게 습관이 되다시피 했다. 컴퓨터 켜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속보가 하나 떴다. 김근태 의원 별세. 그로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슬프다. 그날은 하루종일 우울해 하다 밤에는 결국 울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5년 수유리에서 4·19의거 기념식이 있을 때였다. 그때는 이 기념식이 중요한 시위 형태의 하나였다. 그날 필자도 서울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서울에 와서 별로 해본 적이 없는 `대이동`을 해서 그곳으로 갔다.

학생들,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확성기 목소리가 하나 들려오는데, 음색이 환하게 퍼져나가지 않고 어딘가 억눌려 나오는 듯한 수리목이었다. 수리목은 판소리하는데 좋다는데 이 목소리는 시국을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사람들 집회의 중심에 있었으므로 필자는 자연히 그를 멀리서 보게 되었다. 실망이었다. 그는 전혀 투사 같지 않았다. 점잖게 보였고 신사 같았다. 그런 사람이 이 대규모의 사람들을 끌고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그날 기념식은 경찰이 막아서는 바람에 많이들 끌려가고 도망가는 것으로 끝났다. 지금까지 한 번도 다시 떠올려 보지 않은 그날 광경이 생각난다. 필자는 그 동네 지리를 모르니까 무턱대고 다른 학생들을 따라 민가가 밀집한 어느 곳으로 달려갔다. 여기저기서 잡혀가고 끌려가는 소리들, 쫓고 쫒기는 다급한 소리들이 들렸다. 이제 우리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할 찰나 어느 대문 하나가 열리면서 주인아주머니가 우리를 향해 속삭였다. “빨리들 들어와”

그때는 참 무서운 때였다. 대문 안으로 급히 몸을 숨기고도 모자라 우리는 현관 안으로 해서 그 집 방안에까지 들어가 오들오들 떨었다. 다들 시위 경험이 없는 사람들뿐인 것 같았다. 거기서 얼마나 흘렀을까. 주위가 전부 조용해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바깥으로 나와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그날 본 사람이 바로 김근태였다. 나중에 필자는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텔레비전이나 신문으로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단체를 대표해서 집회를 주도했고, 수배를 받았고, 체포되었다.

과격한 학생운동 그룹 사이에서 그의 변혁론은 이른바 `CDR론`(시민민주혁명론)이라고 해서 몹시 개량적이고 불철저한 것이라고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때의 그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모진 고문을 받았던 일은 여기서 생략하기로 하자. 나중에 기성 정치권에 들어가서도 그는 훌륭한 태도로 일을 해나갔다. 계파 모임에 휩쓸리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통합을 지향했다. 비록 노무현 전대통령을 따라 열린우리당으로 옮겨갔지만 그에게 그냥 복종하지만은 않았다. 김근태는 합리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필자는 그가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정치자금 수수를 고백하면서 레이스에서 물러났을 때 너무나 실망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는 정치인 이전에 변혁가이고 종교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투사였지만 늘 신사였다. 그런 천품을 가진 사람은 참 드물고 귀하다.

필자가 성장해서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에 그가 줄곧 우리 곁에 있었으므로 내 몸 한 부분이 없어진 것 같다. 이 슬픔 때문에 필자는 한 해를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멀리 보고, 한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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