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의 아침, 멀리 금빛 바다를 뒤로 하고 만선으로 기쁨을 가득 실은 어선이 항구로 들어온다. 지난밤 그 매서운 바람을 뚫고, 어구들을 챙겨 캄캄한 바다로 나갔던 그 배다. 밤 새 잡아 올린 고기들로 배를 가득 채우고 위판장으로 들어온 것이다. 출발할 때 빈 그릇만큼 배는 많은 고기들로 채웠다.
임진년 새해 새아침. 저마다 만선을 꿈꾸며 새해를 시작한다. 한 해의 첫출발, 해야 할 일도 많고 챙겨야 할 것들도 많다. 일일이 손가락으로 꼽아보며 올 한 해를 힘차게 시작한다. 올 한 해도 참으로 만만찮은 한 해가 될 조짐이다.
일출을 보겠다고 동해로 밀려드는 차량들로 올 해도 어김없이 동해안 가는 길마다 일대 혼잡을 이루었다. 포항 쪽은 우회도로가 뚫려 훨씬 나아졌다지만 해맞이 열기는 해가 갈수록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다. 날마다 뜨는 해이건만 기어이 새해 첫 날 떠오르는 해를 봐야겠다는 그 집요함에 머리가 숙여진다. 얼마나 바람이 간절하기에 일 년에 한 번 해 뜨는 꼴을 보겠다고 저리 극성일까.
99%의 국민들은 새해에는 무엇인가 달라지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해를 향해 두 손을 모은다. 올 해는 정말 바뀌기를 바라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그들은 믿는 것이다. 밤새 차를 달려 새해를 맞이하는 그 경건함을 밤 새 집어등 불빛에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어부들의 노고에 어찌 견줄 수 있겠는가.
그 많은 요구사항들, 새해면 으레 만드는 버킷 리스트. 빠지지 않는 가족의 화목과 건강, 행복한 가정, 그 행복을 위해 지난해도 열심히 달렸고 그리고 다시 한 해를 맞는다. 경제 사정은 갈수록 더욱 팍팍해진다. 지갑은 오히려 얇아지고 실업자는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다. 자녀 성적도 걱정이지만 지난 해 연말 대구에서 발생한 중학생의 동급생 폭력과 괴롭힘, 그리고 자살 사건의 충격은 우리 모두를 오래도록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중학교 입학하던 해. 당시 교감 선생님은 “Boys, be ambitious!”라고 신입생들에게 유창하게 영어로 이야기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는 윤리 시간에 반복하는가 하면 복도 등에 써붙여 놓았다. 그 말이 어린 중학생들을 은근히 짓누르고 있었음을 살아가면서 차츰 알게 되었다.
이 말을 한 사람의 뜻은 돈이나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위해서 큰 뜻을 품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이 세월의 더께가 덧씌워지면서 청년들에게 출세를 위한 욕망을 갖도록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중학생 자살 사건에도 이 `소년의 야망`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반문해 보는 것이다.
일출시간 구름에 가리었던 해가 어느새 떠올랐다. 가까이 다가오는 고깃배에는 노랫소리 대신 고단함이 가득하다. 문득 비워야 가득 채울 수 있다는 진리가 생각난다. 노자가 말했다. 그릇의 효용은 모름지기 그 빈 공간에 있음을 말이다. 집에 창을 내고 문을 만들지만 방이라는 빈 공간이 있어야 비로서 집으로서의 효용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배가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침몰할 위험에 처하면 배를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필요 없는 짐부터 바다에 던져버려야 한다. 그렇게 배를 가볍게 만들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버려야 할 짐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러면 가라앉는 수밖에 없다.
버려야 한다. 항해를 하려면 짐을 가볍게 해야 하듯, 2012년을 행복하게 만들려면, 무엇인가 바란다면 그만큼 비워두어야 한다. 그래서 올 한 해, 바라는 것이 많고 채워야 할 것이 많다면 그만큼 비우고 한 해를 시작하기를 권한다.
빈 배로 출항하라. 참을 수 없는 분노, 풀리지 않는 숙제, 용서할 수 없는 원한, 갚아야 할 부채, 벗을 수 없는 짐. 이 모두를 내려놓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