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그렇게 흘러갔다. 저녁이 되자 선생님들이 종강 뒤풀이를 하기 위해 낙성대가 있는 한 음식점에 모이게 되었다. 이런 자리가 되면 세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환담을 나누고 회상도 하고 현안에 대한 의견도 모으기 마련이다.
누군가 이 자리에서 81학번 동창이 하나 유명을 달리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동창회에서 문자를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누군데? 라고 물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난 사람의 이름을 듣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났단 말야! 우리랑 학번은 같아도 나이가 두 살은 위였는데.
기억나지? 그 친구. 학교 다닐 때부터 워낙 독특했잖아.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해왔다고 하더라구. 30년을 계속 한가지 일을 해왔던 거야.
선배격 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분은 여자였고, 밤에 어딘가에서 떨어져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서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늦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은 참 짧고도 허망하다. 바로 며칠 전에 이 돌아가신 분이 연락을 해서 81학번 동창들이 모였었다고 했다. 한 일곱 명 정도가 모였는데, 아무래도 이 친구가 마지막 인사를 하느라고 그렇게 모이도록 한 게 아니냐고들 했다. 바로 앞에 죽음이 가로놓여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이 생의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삶은 언제나 죽음을 예비해 두고 있고 죽음 위에 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삶에 대한 어떤 태도가 발생하게 된다. 하나는 삶 자체를 중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삶의 의미를 어떤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연역해 내는 것이다. 후자의 태도는 결국 종교로 통한다.
어느 쪽이나 삶을 가치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전자의 측면에서 보면 삶은 누군가에게 그 의미를 묻지 않고도 진지하게 풀어나가야 하는 어떤 과제 같은 것이 된다. 삶은 이 과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바로 이틀 전에 우리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다. 북쪽을 오랫동안 통치해 온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는 현지지도를 다니는 열차칸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했다. 텔레비전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북쪽 사람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비춰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죽음의 소식을 접한 필자의 동료 한 사람의 반응은 너무나 차가웠다. 잘 되었다는 것이다, 그보다 이 추운 날씨에 그의 죽음으로 인해 더 고생할 북쪽 사람들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생각했다. 이 사람의 존재로 인해 북쪽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말 못할 고생을 했지만, 이 사람 자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형식을 살아내느라 그렇게 군림해 왔던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러면서도 이 사람의 삶을 절대로 긍정할 수가 없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비자각적인 행위 과정이었다 할지라도 바로 그런 삶 때문에 고통받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한 노동운동가의 죽음과 한 철권 통치자의 죽음이 교차하는 장면을 보면서 필자는 삶이란 얼마나 허망하면서도 준엄한 것이냐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또 바로 며칠 전에는 포스코를 개척한 박태준 회장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필자는 생각했다. 삶을 살아가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일념, 즉 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여기에 오늘 필자는 한 문장을 더 추가한다. 자신의 삶을 타자들의 삶에 비추어 옳고 정당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