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뽑힌 날들이 나를 적셨다
그날 박물관은 문을 열고 있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시간들이 눈을 뜨고 오물오물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16세기 시간이 14세기 시간 옆에서
기원전 3세기 시간이 일련번호 2222 시간 옆에서
이집트 조각상은 모나리자 옆에서
중국 도자기는 페르시아 유물 옆에서
분노할 줄 모르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다만 저장된 시간들이 넘쳐서
현재를 향해 역류하는데
박물관에서는 현재가 살지 못한다
마감시간에 쫒겨 문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내가 오늘 혼잣말하고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 그 저장된 과거의 시간들이 온통 현재의 시간들로 역류하는데 `박물관에서는 현재가 살지 못한다`라는 화자의 말은 아이러니컬하기 짝이 없다. 과거가 압도적인 속력으로 현재로 다가오고 현재를 현재로 두지 않는 박물관의 폭력이랄까 위력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이것은 시인의 허무에 대한 깊은 인식과 차가운 리얼리즘의 표출이 아닐 수 없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