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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플라타너스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07-21 23:18 게재일 2011-07-2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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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지리한 장마가 끝나고 드디어 뜨거운 여름이 왔다. 너무 오래 계속된 비라서 뜨거운 햇살조차 반가워 지하철에서 내려 학교로 향하는 언덕을 넘어 걸어갔다. 고적한 여름날은 더욱 좋다. 아무도 없는 여름날 골목, 그 뜨거운 정적은 어떤 예술작품보다 아름답다. 나무에서 따갑게 매미가 우는 여름날도 좋다. 매미 울음 소리를 들으며 하루가 가는 시간들을 음미해 보면 삶이 얼마나 한가롭고 은근하던가.

다 왔다. 정문이다. 그래도 연구실이 있는 곳까지 더 많이 걸어 올라가야 한다. 나는 자동차들이 천천히 지나치는 대운동장 옆을 걸어 법대 쪽으로 꺽어졌다. 규장각이 보이고 자하연 연못이 보인다. 아, 나무들. 내가 스무살이 되던 해 이 연못을 처음 보았고 연못가에 늘어선 나무들을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그리 크지 않은 나무들이었는데, 이제 잎도 무성해지고 무섭도록 짙은 여름빛을 발산하고 있다. 나는 저 검은 녹빛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여린 봄빛보다 나는 저 무거운 여름빛을 사랑해왔던 것이다.

자하연 연못 위쪽으로 이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보일 차례다. 나는 자하연 연못과 마찬가지로 스무 살 나이에 처음 보았던 저 플라타너스 나무들을 올려다본다. 내가 여기 오기 훨씬 오래 전부터 서 있던 나무들답게 저 나무들은 줄기와 가지를 사방으로 원을 그리며 뻗은 채로 고요히 서 있다. 하나, 둘, 세 그루, 세 그루 나무가 만들어 내는 넓고도 시원한 그늘 아래 선다. 오늘 따라 이 나무들이 참으로 기품 있게 보인다. 마치 장년,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남자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다.

사실은, 나는 이 플라타너스 나무들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것이다. 우선 저 얼룩덜룩한 줄기가 싫었다. 또 가을이 되면 비할 바 없이 흉한 낙엽을 떨어뜨리며 다른 나무 낙엽들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가을 정경을 훼손시키며 서 있었다. 플라타너스 낙엽은 병들어 녹이 슨 것 같은 흉한 빛깔에, 그. 이파리 모양은 또 얼마나 억세게, 볼품없이 크기만 하던가.

그런데 오늘 보는 플라타너스는 그런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나무가 아니다. 젊은 날의 흉한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이제 이 나무들은 누가 쉽게 넘보지 못할 높이와 깊이를 가지고 내가 사랑하는 캠퍼스 한 곳을 든든히 지키고 서 있다. 뜨거운 여름날 멀리서 올라온 사람이 넉넉히 쉴 그늘을 만들어주면서 넓고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다.

사람도 바로 이 플라타너스와 같다. 젊을 때는 누구나 싱싱하고 아름답지만 생김생김이 잘 나지 않아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남자는 여자는 물론 같은 남자로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친구도 많지 않은 경우가 있다. 못 생겼다는 것이 은근히 그 사람을 압박해서 어떤 경우엔 성격조차 내성적으로, 말수 적게 만들어 놓기도 한다.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도 않고 자기 혼자만의 일을 묵묵히 치러 내거나 남들 잘 모르는 취미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이제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이 전혀 결정적이지 않은 때가 온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잘 생긴 것 같지 않지만 몸 전체에 온화한 기품이 넘친다. 넉넉한 성품이 주는 여유와 한가로움이 옆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만들어 준다. 균형 잡힌 어깨가 강인함을 만들어 내고 굳센 팔다리가 인생의 곡절을 감당해온 인내와 용기를 느끼게 한다.

반면에 아무리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던 사람도 마음 잘못 쓰고 함부로 쓰고 아집에 사로잡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느덧 그 미운 성품이 얼굴에 드러나 버린다. 자기만 알고 자기 잘난 것만 생각한 세월이 그 사람의 얼굴에 반격을 가한 나머지 친화감 대신에 멀리하고 싶은 인상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여름은 인생의 장년, 중년이다. 저 높고 깊은 플라타너스처럼 내 삶을 아름답게 가꿔 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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