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도의 역사
인간은 석기시대부터 생존의 방식으로 창과 도끼, 활을 사용해 사냥 도구로 사용해 왔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중 활은 사냥도구에서 근·현대 전쟁사의 주요 무기로 사용돼 왔고 생활도구에서 전쟁 무기로 발전을 이끌어온 대표적인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활은 무기라는 개념에서 신체적, 정신적 건강증진을 위한 스포츠로 전환됐다.
활과 화살은 발명시기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직립원인이 활과 화살을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 고고학자들은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우리 역사에 비추어 보면 백성들의 심신단련과 호국정신의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활과 화살을 사용했으며 그 종류도 다양했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국궁뿐이다.
◆궁도 경기방법
궁도 경기는 단체전과 개인전으로 크게 나뉜다.
단체전에는 시·도대 표 7명이 출전해 상위 5명의 기록합계로 순위를 정하는 시·도대항전과 사·정 대표 5명이 출전하는 정대항전이 있다.
경기 방식 및 진행은 각 대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보통 시·도대항전인 경우 각 시·도 대표 1명씩을 1개조로, 정대항전인 경우 같은 사정에서 출전한 5명을 1개조로 한다. 개인전인 경우는 참가신청 순서에 따라 7명을 1개조로 해 대(같이 서서 한 과녁을 향해 쏘는 일 개조)를 편성하고 각 대는 교대로 나와 1순(한 대에서 편성 된 각 선수 가 1발씩 돌아가면서 쏘아 전체가 모두 5발씩 쏘는 것)씩 쏘며, 전체기록 합계로 등위를 결정한다.
◆영주 충무정의 연혁
1930년대 지방 인사 한복흥 장석주 박명덕, 석귀봉, 김주선 등 5인이 뜻을 같이해 관덕정이란 정명으로 영주교 및 노천사장에 궁도장을 건립했다. 1936년 7월 영주초등학교 뒤편 옛 신사 자라에 사장을 옮겨 약 4년간 이용됐고 6·25동란으로 휴정했다가 수복 후 1953년 봄 원당천에 임시 궁도장을 옮겼다.
1955년 1월 영주교 밑으로 다시 옮겼으나 1962년 5월 18일 영주 대수해로 다시 중단됐고 수해복구사업으로 영주 공설운동장이 신설되면서 공설운동장 강변 쪽 부지에 새로운 궁도장을 마련했다.
당시 정건물이 없어 궁시 장비를 보관, 관리할 수 있는 궁방이 없어 어려움을 겪다. 1970년도 전국궁도대회에서 우승한데 이어 경북도내 궁도 정대항전에서 우승의 영광을 얻게 되자 정 건립의 필요성을 통감, 정 건립 창건기성회가 발족했다.
발기인에는 영주군 체육회장(군수) 김정식, 영주군 경찰서장 송진수, 영주군 번영회장 정현석, 영주군 상공회의소장 김두식, 영주군 궁도회장 양익호가 활동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금교성, 양익호, 김운학, 김두식, 남봉석 등 5인과 본정 강창세 사우의 적극적인 섭외로 당시 국회의원 김창근씨의 도움을 받아 1971년 4월 7일 구성산 기슭 서천 강변에 임시 건물을 세우고 충무정 현판식을 가졌다. 1994년 5월 영주에서 처음 개최한 제32회 경북도 도민체육대회에서 본정의 협소로 궁도대회를 치를 수 없게 되자 1993년 김지순 영주시장과 영주시의회 우영구 의장, 전동호, 충무정의 전 회원이 힘을 모아 지금의 영주시 휴천동 1109번지에 부지를 매입해 와가 회의실 34평, 사대 55평을 신축했다. 경북도내에서 가장 우수한 궁도장을 충혼탑 옆에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정을 건립, 1994년 5월 10일 준공과 동시 이전해 지역 궁도 발전의 터전이 됐다.
◆충무정의 중요성
본 정의 과녁을 홍띠로 한다. 유래는 조선 말엽에 무과에 급제한 인사로써 헌종 때(1848년) 손종책, 당시 직책은 수문장이고 철종 때는 선전관 훈련원 첨정 좌별장, 고종 때는 무과시관 역임한 향사출신이 있다. 또 손상규 선생도 고종 때 부령까지 지낸 장군으로 활약하는 등 유명한 장군이 배출된 곳이다. 장군의 위상을 드높이 기리고자 궁도장의 과녁을 홍띠로 했고 이 또한 자부할만한 선조의 유래라 할 수 있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