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귀에 너무 익숙한 말이지만 시장의 생명과 같은 원리이자 시장이 번성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경쟁이다. 경쟁의 본질은 어떡하든 상대를 이기는 것이다. 상대를 이겨야 하는 것이 경쟁의 숙명이다. 이것이 음모를 부르고 야합을 낳는다. 음모와 야합을 시장은 불공정이라 규정한다. 어떡하든 상대를 이겨야 하는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서 `그것은 불공정`이라고 들이대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한다. 불공정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정부 조직이 어깨에 힘을 넣어 시장을 노려본다. 시장의 상품은 어떤 상대에게는 질 수밖에 없고 어떤 상대에게는 이길 수밖에 없다. 이것이 시장의 처절하고 비정한 원리다. 그러나 인간은 시장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바뀌었다. 문자를 발명하고 역사를 쓰기 시작한 이래의 수천 년에 걸친 역사적 경험을 통틀어 시장이야말로 돈을 많이 벌고 부(富)를 창출하는 가장 능률적인 도구요 제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 부자가 되어 안락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인간의 첫 번째 욕망인 바에야 경쟁을 생명 같은 원리로 삼는 시장이 경제 영역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가 사회적 문제의 근원이요 출발점이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어 안락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인가? 이 질문이 인간의 영혼 속에는 박혀 있다. 만약 그것이 영혼 속에 박혀 있지 않다면, 그는 인간의 품위를 크게 상실한 존재로서, 짐승에 가까워진 인간이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인가? 이에 대한 정답 속에는 반드시 `타인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라는 것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국가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어떤 개인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개인은 시장에서든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 삶이란 것이 하나뿐인 지구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모든 개인이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이 운명적 조건이 모든 개인에게 반드시 `공동선(共童善)`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하기를 요구하며, 모든 개인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이 운명적 조건이 모든 개인에게 또 다른 공동선인 `생태와 환경`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하기를 요구한다.
시장지상주의와 공동선은 모순관계를 형성한다. 시장 사회와 공동체주의도 모순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한쪽도 일방적으로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더구나 포기할 수 없다. 어느 한쪽을 포기하는 순간, 그 사회는 파멸의 씨앗을 잉태하게 된다. 제도의 오류를 극복해온 자본주의가 그것을 증명하고, 제도의 오류를 극복하지 못한 공산주의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그것은 시장 경제와 공동선이 조화롭게 추구되는 사회로 발전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 경제를 투쟁의 대상으로 설정한 세력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시장지상주의의 `시장 사회`로 가는 것도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시장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상품 가치가 될 수 없는 가치마저도 상품 가치로 환산해 버리는 사회가 바로 시장 사회다.
서남표 총장의 경쟁 방식은 시장 사회로 가는 방식이다. 학습에 대한 젊은 영혼의 고뇌를 징벌적 등록금으로 환산하는 그 방식이야말로 결코 시장 사회에 편입시키지 말아야 할 교육 고유의 어떤 비(非)시장적 가치마저 시장 가치에 내줘 버린 것이다.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고 한국 언론이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그것은 한국을 대표할 `대중소설`의 수준에 머무른 것이다. 한국에서 잘 팔린 대중소설이 시장 가치로의 환산에 익숙한 미국 대중과 만나는 것은 엄격히 말해 하나의 상품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상품 가치가 지배하는 시장 사회, 이것이 근대화 50년 한국이 극복해야할 또 하나의 시대적 국가적 과제로 대두해 있다. 분단극복만큼이나 버거운 짐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