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들어가지 못해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기술교육의 산실인 카이스트에서 왜 이런 일이 발생되고 있을까?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까지 버린 학생들의 말 못할 고민은 무엇이었는지? 우리 모두 겸허한 자세로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영재 한사람이 대략 5만명 정도의 국민을 먹여 살린다는 분석이 있다. 자원이라고는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우수한 인적 자원으로부터 생산되는 `창의`만이 우리의 살 길인 것은 분명하다. 특히 과학기술분야의 발전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바로미터라고 볼 수 있다. 카이스트, 포항공대, 서울대 등 세계와 어깨를 겨루고 있는 우수한 공과대학에서 배출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오늘 이 나라의 번영을 가져 온 주인공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 수재들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엄청나다 할 터인데, 이번 사태로 인한 실망 또한 큰 것이 사실이다.
모두가 되돌아봐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오죽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라는 안타까움이 앞서지만, 삶의 가치에 대한 보다 깊은 고뇌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눈앞의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인생의 궁극적인 승리가 아닌데도 말이다. 젊은 시절 전혀 우수함을 인정받지 못한 아인슈타인이라든지 하버드를 과감히 중퇴한 빌게이츠 같은 통 큰 패기는 왜 갖지 못했는지?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가르치는 교수 역시 이번 사태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할 것 같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수이기 전에 스승이자 멘토로서의 인간적인 대화와 소통이 얼마나 있었는지 묻고 싶다. 하기야 그토록 경쟁위주의 시스템에서 교수인들 피해자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서남표 총장은 이번 사태를 불러 온 가장 결정적인 원인 제공자로서 세간의 평가의 도마 위에 올라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나친 경쟁과 성과 위주의 학교 운영과 소통 없는 일방적인 리더십은 이제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라는 점이다. 감정을 가진 인간을 교육시키면서 너무 엔지니어링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나하는 아쉬움이 있다. 인간은 기계와 달리 감정을 가진 동물이다. 한창 젊은 나이에 눈만 뜨면 숨 막히는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숨을 좀 쉴 수 있는 공간과 여유를 만들어주어야 할 것이며, 삶의 목적과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교육이 더욱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오늘의 카이스트를 의욕적으로 이끌고 온 열정과 노력에 대해서는 함부로 돌팔매질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 나라의 과학기술의 발전은 선견지명을 가진 지도자의 리더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2차 대전에서 패망한 전후 일본의 중의원이 된 당시 27세의 나까소네 전 수상은 맥아더 원수에게 당한 굴욕을 과학기술의 부흥으로 일본을 다시 일으킬 것을 다짐한다. 그후 과학기술성장관이 된 나까소네는 전후 일본 과학기술발전의 주역이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박정희, 박태준 등 과학기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지도자가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서남표 총장이 추구하고자 했던 개혁의 정신만은 살려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나라의 살 길이다. 오늘따라 소리 없이 세계와의 경쟁에서 많은 성과를 내고 있는 포스텍의 총장, 교수, 학생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더욱 생기는 것은 나만의 심정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