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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경쟁사회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04-14 23:29 게재일 2011-04-1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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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창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장
카이스트에서 지난 1월6일부터 4월7일까지 4명의 학생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영재라고 불리는 학생들이 다니는 대학에서 죽음의 도미노가 일어나고 있다. 카이스트에 입학하면 모두 경사가 났다고 축하해주는데 그런 명문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무엇이 부족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걸까? 성적이 모자라서 카이스트에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합격한 학생이 스스로 죽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세상사가 모두 아이러니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유독 카이스트에서 죽음의 도미노가 일어난 까닭은 무엇일까?

카이스트 학생들은 학교가 요구하는 경쟁 체제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가 경쟁자이니 누구에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을 수도 없다가 올 들어 4명의 학우를 보내는 참담함을 겪고는 학교의 경쟁체제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간 카이스트는 차등수업료제라는 것을 시행하여 성적이 부진한 학생에게 등록금을 더 많이 받는 제도를 시행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이 문제를 미친 등록금제라고 한다고 했다. 학생들의 참았던 불만이 집단으로 표출되자 총장이 사과하고 등록금 차등수업료제를 철회한다고 밝혔다.

총장이 사과하고 문제가 되는 제도를 바꾼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문제는 카이스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사회 전체에 이런 경쟁체제가 보편화되고 당연시 되고 있다. 카이스트의 문제는 지반이 약한 곳에서 화산이 분출하듯이 문제가 가시화되었을 뿐이다. 우리사회 전체가 심한 스트레스로 부글부글 끓고 있어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수위에 도달해 있다.

우리사회에서 쓰는 경쟁이라는 말은 얼핏 전쟁이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전쟁은 적의 상황을 탐지해 적을 제압하여 이겨야 한다. 일정한 규칙도 윤리도 없다. 적을 공격해 이겨야 승리자가 된다. 진정한 경쟁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부단히 노력해 자기의 능력이나 수준을 극대화하는 것이 진정한 경쟁의 목표다. 수행하는 스님도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도 자기 내부에 잠재하는 가치를 부단히 노력하여 극대화시킴으로써 가장 높은 수준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교육 선진국이라고 하는 핀란드나 유럽의 학교에서는 객관식 시험이 없다. 점수로 서열화하지도 않는다. 그룹으로 과제를 받아 서로 협력하여 개념을 이해하는 수업을 한다. 교사가 제시하는 학습목표에 도달하면 교육과정을 이수한다. 그래도 핀란드는 학력 수준이 세계 1위다. 취업을 할 때도 졸업장도 필기시험도 없다. 논술 시험을 보거나 면접시험을 보아 맡은바 일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 평가하여 입사를 결정한다. 이에 비해 우리의 아이들은 어떠한가? 초등학교 때부터 일제고사를 보아 줄 세우기를 한다. 학생 간에도 서열이 매겨지고, 학교 간에도 서열이 매겨진다. 그 서열에서 낙오하면 이른바 루저가 되기 때문에 몇 개의 학교를 다니고 과외수업을 받으며 세계 최고의 사교육비를 쓰고 있다.

기성세대라고 다르지 않다. 회사원이나 공무원들에게도 성과급이라는 것이 있다. 성과를 많이 올린 사람에게 더 많은 보수를 준다는 것이다. 교사에게도 성과급이라는 것을 주고 있다. 교사의 성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교사의 성과를 서열화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교수들도 매년 우수한 학술지에 논문을 얼마나 발표했는가를 가지고 서열을 매긴다. 양심을 가지고 진정으로 학생 지도를 하여서 존경받는 교수일지라도, 세계적으로 학문적 성과를 거둔 학자일지라도 당해 연도에 논문발표 성과가 없으면 무능한 교수인가?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를 해임하고 성과급을 받지 않겠다는 교사들에게 위협을 가해 성과급을 받게 하고 있다. 경쟁에 몰아넣기 위해 그야말로 안달이 나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 경쟁을 요구하지 아니하는 곳이 없다. 신자유주의라는 논리에 세례를 받은 미친 경쟁의 망령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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