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친지 결혼식이 마침 서울 이대 옆이어서 자투리 시간을 내어 인근 대학 캠퍼스를 찾았다. 왁자하게 무리지어 몰려 다니는 학생들. 밝고 자신만만한 표정에서, 생기 넘치는 목소리에서 푸릇푸릇한 젊음이 엷은 봄옷을 비집고 나온다. 제각각 이름을 갖고 있는 수천 수만의 학생들이 젊음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다.
그래, 너희들이 바로 꽃이다. 너희는 너희가 꽃인 줄 알기나 하느냐.
민태원은 `청춘`이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라고 규정했다. 그 청춘에게 사랑과 이상(理想)이 있음으로 해서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온갖 과실이 가능하다고 그랬다. 특히 젊은이가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이상은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상은 인생을 풍부하게 만드는 꽃이고 인간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라고 했다. 인생의 황금시대가 청춘이라면 꿈이 없는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 꿈과 이상은 바로 청춘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봄날, 꽃잎이 지듯 또 대학생이 자살했다. 카이스트에서만 올해 벌써 네 번째. 과학고를 졸업한 영재이자 언제나 승리자였던 젊은이. 학생들의 자살이 이어지자 동료 학생이 “학점 경쟁에서 밀려나면 패배자 소리를 들어야 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서로 고민을 나눌 여유조차 없다. 이 학교에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대자보에 썼다. 그들에게서 이상은 빠져버리고 학점에만 매달리는 우울한 청춘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학이 자살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단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자살에도 타살의 요소가 포함돼 있다는 일반적 인식으로 유추해도 대학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성적 상위 1%의 영재들만이 모인 대학에서도 또 순위는 매겨져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일부에는 `징벌적 수업료` 등 일견 유치해 보이는 여러 제도들이 언제나 1등만 해 왔고 그래서 패배를 몰랐던 그들을 절망으로 빠뜨렸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그 문턱에까지 갔을 것이며 또 그보다 많은 학생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었을 것인가.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은 “수재들이 모이는 일류 대학의 학생 자살 사건은 개교 이래 늘 있어왔다”는 말로 사건을 합리화하려 했다. 그는 지난 1월에도 “세상에 압력 안 받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고 했고 이번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미래의 성공을 위해 지금의 실패와 좌절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글을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
맞는 말이다. 그의 말처럼 세상에 공짜가 없고 압력 안 받고 스트레스 안 받고 사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카이스트에 입학할 때는 공부하려고 선택했을 것이고 학문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서남표 총장의 총론은 옳다. 그러나 천하의 수재들을 모아 놓고 그들을 세계 최고의 과학 인재로 키우는 것이 카이스트의 목표라면 그 목표에 맞게 그들을 교육하고 평가하는 방법도 달랐어야 했다. 특정 과목 성적만으로 한줄 세우기 식의 평가가 아니라 학생의 전형과 선발의 다양성처럼 교과과정과 평가도 방법과 유형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온실 속이 아니라 벌판에서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방법도 포함되어야 한다.
수천만, 수억만 꽃송이들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는 벚나무를 본다. 그 꽃들은 송이마다 모양이나 크기가 한결같아 결코 서로 다투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 젊은이들, 그들이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도록 사회가, 대학이 도와주어야 한다. 너희는 저마다 사그라지지 않는 이상을 가져야 한다. 너희가 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