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출신의 이참 한국관광공사 사장이다. 1978년 한국에 온 그는 본명 베른하르트 크반트 대신 `칼과 도마`를 연상시키는`칼 토마`란 이름을 썼다.
그후 귀화 이름을 이한우(李韓佑)에서 이참(李參)으로 바꿀 땐 `한국을 돕는 사람`에서 `한국에 참여하는 참된 한국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귀화인 공기업 사장 1호가 된 그는 그의 이름처럼 됐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인생의 절반을 이 나라에 바쳤는데, `당신은 이 나라 사람이 아니다`라며 따돌리는 기분을 느낄 때가 많았다”고 그간의 고충을 털어놨다.
외국인이 이 땅에 들어와 새로운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도 내놓겠다며 살아온 인물은 드물지 않다.
조선시대 귀화한 네덜란드인 얀 얀스 벨테브레, 우리 이름으로 박연이다.
그는 1627년 폭풍으로 표류, 경주 앞바다로 흘러들어왔다.
이후 조선 땅에 정착한 박연은 정묘호란 후 군사력 강화가 시급한 조선을 위해 홍이(紅夷)포라는 네덜란드 대포를 개발해 병자호란을 이겨낸 일등 공신이 됐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왜병 장수로 한반도에 들어왔다 귀화한 일본인이다.
본명은 사야가. 조선 진주 직후 귀순한 그는 조총을 우리나라에 전해 오히려 왜적을 무찌르는 데 앞장섰다. 그 뒤 북쪽 변방 수비를 자청해 10년간 국경을 지켰고,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도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이 정2품 정헌대부까지 올랐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을 때는 “어찌 개 같은 오랑캐 앞에 무릎을 굽힌단 말인가”하고 통곡했다.
태조 이성계의 오른팔은 여진족이었다. 퉁두란, 훗날 청해 이씨의 시조가 된 이지란 장군이다. 두 사람은 무예 겨루기로 맺어진 의형제였다.
태조가 물동이를 철환으로 꿰뚫으면 이 장군이 화살촉에 솜을 끼워 쏘아서 그 구멍을 막았다 한다.
조선 개국 9공신 중 한 명인 설장수 역시 위구르 출신의 귀화인이다. 중국어와 유학에 능통해 8차례나 사신으로 활동한 외교 전문가였다.
고려에 과거제도를 도입한 쌍기 역시 중국 후주 사람으로 사신을 따라왔다가 광종의 눈에 들어 귀화했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100만명을 넘어섰다.
결혼이민자 등으로 형성된 다문화가족이 15만 세대에 이른다. 인구 대비로는 2.3% 수준이다.
이미 다민족 국가 범주에 들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이미 지난해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이라는 명칭을 쓰지 말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다민족 국가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정서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철저한 순혈주의에 갇혀 있다.
이참씨의 한국관광개발공사 사장 발탁으로 이같은 순혈주의가 타파되고 진정한 글로벌 문화가 정착되길 기대한다.
국가는 물론, 기업들도 영역에 겹겹이 담을 치는 또다른 순혈주의를 지양하고 글로벌 인재영입을 통해 조직의 다양화를 추구할 때다.
빌 게이츠 회장 기술자문역이자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기술자인 아눕 굽타 마이크로소프트(MS) 부사장.
핵심인재 영입을 위해서라면 회장 전용기까지 보낼 정도인 MS사는 끝내 이적을 거절하는 아눕 굽타를 확보하기 위해 아눕이 소속된 회사를 아예 통째로 사버렸다.
조조의 재능제일의 인재등용방침이 구현령(求賢令)으로 공포된 역사도 같은 범주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