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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번째 안부 - 벗

관리자 기자
등록일 2009-05-12 20:34 게재일 2009-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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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조용하던 손전화로 저녁 무렵 편지가 왔네요.



‘혼자 여행 중


정박선에 앉아 키조개에 소주 한 병


구름도 잿빛 바다도 잿빛


왜 중요한 순간에 하늘과 바다는 같은 색일까예


왜 구름과 바다를 보는데 당신 생각날까예’



조곤조곤한 말투가 그대로 들려오는 듯 했어요.


기계 속에 담긴 짧은 편지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으며 행복하였지만


답장은 일부러 하지 않았답니다.


호젓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사과가 사과나무를 다 떠난 늦가을


상옥 골짜기 당신의 작업실에서 보낸 시간이 생각납니다.


바닷가 사는 저는 횟감과 조개를 들고 가고


골짜기 밤이 제법 춥다며 당신은 아궁이에 불 잔뜩 넣었지요.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앞산 능선이 나뭇가지 총총 세우는 저녁이 오고


개밥바라기 결국은 밤하늘 온통 별들을 불러 모을 때까지


흙내 나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숯불에 조개 올리며


이슬처럼 달디 단 소주를 우리가 마셨던가요?



‘시간은 내 안에 충분하고 풍경은 나를 이루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흡족하네예’



며칠 걸어야겠다고 훌쩍 넘어 간 제주도에서


쪽빛 바다 벼랑 위에 앉아 있다며 새해 둘째 날 보내 준 엽서도


한국의 영화 시리즈 시집가는 날 우표에 선명한 소인을 찍은 채


늘 제 앞에서 저리 살고 있습니다.



남해 봄쯤을 다녀오자고 언젠가 그대와 나 마음 맞춘 적 있지요.


황토에 풋마늘 솟는 아린 풍경 다 져버리도록


눈앞의 봄들 닦느라 안부 한 번 서로 묻지 못하였네요.


그러나 가다가 만난 가장 고요한 자리에서 잠시 쉴 때마다


꼬박꼬박 보내 준 몇 마디 마음처럼


나서는 저의 길에도 돌아보면 문득 그대가 있는 것을 압니다.



한 도시의 남쪽 북쪽 끝 마을


작정하고 서로 나서면 고작 반시간 남짓인데


당신은 삶을 조각하고 나는 졸편 앞에 무릎 꿇느라


계절 두어 개쯤 흐르도록 마주하지 못할 것이 자명하지만


주고받는 마음 몇 자로도 긴 세월 가는 벗 있어 좋습니다.



‘이런 하루가 평생 같고 평생이 하루 같은 날들이 이어지길 바래봐예’



엽서 속 글귀가 그대 참 보고 싶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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