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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정기자가 만난 여성들 (63) 시인 권선희

윤희정기자
등록일 2009-05-01 21:02 게재일 200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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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 시인’으로 유명한 권선희(44·사진) 시인.


휘날리는 숫사자 갈기 같은 머리칼, 낡은 고무줄 바지에 빨간 구두를 신을 줄 알고, 어눌한 듯 느릿느릿 말하지만 결국 할 말은 다 하는 사람. 정작 중요한 건 잊어도 사소한 건 붙잡고 늘어지고, 천박하다 싶은 언어와 고귀한 언어를 한 그릇에 쓱쓱 비벼 내밀곤 맛있게 먹으라 하는 그는 그야말로 ‘청정(淸淨) ’시인이다.


딱 3년만 구룡포에 들어가 살면 비린내 풀풀 나는 시집 한 권 들고 돌아오지 않겠냐며 보따리를 싼 그는 9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나올 기미가 없다. 자신이 왜 그곳에 들어갔는지를 까맣게 잊고 어울렁더울렁 바닷속 물고기처럼 구룡포의 풍경과 사람살이에 어울려 산다.


“사는 게 뭐 별건가요? 눈 뜨면 일어서 몸뚱이 굴리다가 저녁이면 지친 마음 다독여 눕히며 가는 거지요.”



춘천이 고향인 그가 처음 포항에 온 것은 해병대 장교였던 남편의 근무지 때문이었다.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시를 전공했지만 시쓰기는 결혼과 함께 일단 멈추었다.


“저는 솔직히 시인으로 사는 게 꿈은 아니었어요. 딱히 무엇이 되어야 겠다, 혹은 되고 싶다, 라는 꿈을 꾼 적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당시엔 그저 사랑이라 여기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오로지 목표였거든요. 왜 그랬는지 몰라요.”


그가 비죽이 웃는다. 백령도, 제주도, 광주, 진해로 쪽짐을 싸며 옮겨 다니던 세월, 그러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아야 하는 현실은 제약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자유로움을 먼저 배운 그에게 ‘행복’이란 걸 선물하지는 못했다.


어찌어찌 포항에 정착하게 되면서 ‘푸른시’ 동인과 ‘포항문인협회’를 만난 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였다는 그.


“저는 13년 가까운 세월동안 시를 까맣게 잊었어요. 포항에 문인협회나 동인활동이 있는 것조차도 짐작하지 못하며 살았지요. 그저 어렴풋이 남아있는 건 예전 스승이나 선배들로부터 받은 보이지 않는 막연한 느낌뿐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개념이 서기도 전에, 미치도록 뜨거운 정신도 치열하게 다가갈 수 있는 몸도 만나기 전에 떠나온 탓일 거예요. 게다가 아무런 미련도 없고 간절하게 그립지도 않았던 걸 보면 시도 내게서 말끔하게 떠났다는 거겠죠?”


시동인 ‘푸른시’는 그에게 낯선 의욕을 샘솟게 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잊었던 ‘시’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야릇한 시간들을 선물한 것이다. 내륙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포항 땅에서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바다였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파도치는 풍광도 풍광이었지만 눅눅한 가난과 비린 내음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생경한, 그러나 어느새 푹 절이고야 마는 바다 냄새들.


“아니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시를 쓰려면 그곳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노동시를 쓰려면 현장으로 가야 하는 것처럼 비린 시를 쓰려면 바닷가에 살아야 한다는 것, 그건 당연한 것이었어요.”


그렇게 2000년 3월 구룡포로 들어 간 그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번호를 매기기 시작했다. 우스운 것은 구룡포 연작이 2번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1번은 남겨 두고 싶었어요. 언젠가 제가 살다 떠나는 날, 그 때 1번이라는 번호를 붙일겁니다. 가장 구룡포다운 시가 한 편 와줄 때까지 살고 싶네요.”


결국 124번까지 매기곤 2007년, 그러니까 구룡포에 들어간 지 7년 만에 첫 시집 ‘구룡포로 간다’를 발간했고 그것은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시집을 내고나니 뭔가 텅 빈 느낌이었어요. 그토록 매달렸던 시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더군요. 조금은 초조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어쩌겠어요. 또 기다리며 사는 수밖에….”


그러나 매사 바쁠 것 없이 천하태평인 듯 한 그는 지난해 여섯명의 사진가와 다섯명의 작가가 참여한 르포집 ‘예술밥 먹는 사람들(도서출판 눈빛)’을 발간했고, 최근 조중의 소설가와 공동으로 작업한 ‘구룡포에 살았다’를 발간했다. 이는 구룡포에 남아있는 일본인 가옥 거리를 새로운 시대적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포항시의 기획에 참여, 양쪽 나라를 오가며 100여년 전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어민이라는 소시민의 일대기에 포커스를 맞추고 추적한 8개월 남짓의 흔적이다.


“구룡포에 살다보니 많은 것이 보였어요. 그 중 시가 되지 못하는 부분들은 산문이나 채록을 통해 글로 옮겨 놓았지요. 고랫배 선주, 해녀, 머구리, 목선 목수…. 일본인 가옥 관련 이야기도 마찬가지 였지요. 그러나 시장님의 애정 어린 독촉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무척 게으른 사람이거든요.” 이 책은 일본어판으로도 발간돼 오는 6월 초 도쿄에서 구룡포거주 일본인 후손과 기업인, 일본 언론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현지 출판기념식을 가질 예정이다.


“아쉬움이 많지만 일단 저희들 몫은 여기서 끝났어요.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열쇠 삼아 수없이 많은 문을 열게 되기를 바랄 뿐이지요. 그러나저러나 이제는 저에게 다시 시가 와 주셔야 할 텐데 도무지 기미가 안보여 답답도하지만 앞으로 어떤 시가 내게로 올까 무척 궁금하답니다.”


치장하는 것은 멀어진 지 오래, 헐렁한 바지 차림으로 앞으로도 어스름한 저녁이면 읍내 탁주집으로 들고, 마을 사람들과 넙죽넙죽 인사하며 흐르는 세월들은 또 어떤 문장으로 세상에 나갈까 궁금하다.


“시를 왜 쓰나요?”


“글쎄요….”


“구룡포가 좋아요?”


슬그머니 웃음으로 넘어가는 그를 대신해 구룡포 앞바다가 손바닥 짝짝 치며 놀고 있었다.


시인이 사는 마을도 시인을 닮아가고 있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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