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포 포항기계중앙교회 담임목사
지난 여름은 무척 더웠다. 그 무더위도 계절의 변화 앞에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입추(立秋)를 지나 처서(處暑)가 지나는가 싶더니 벌써 24절기 중의 하나인 백로(白露)도 지났다. 백로는 들녘의 농작물에 흰 이슬이 맺히고 가을 기운이 완연히 나타나는 절기다. 그야말로 황금들판이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이다. 이때가 되면 고추는 더욱 붉은 색을 띠기 시작하고 알밤은 아름답게 익어간다. 백로가 지나면 맑은 날이 연이어지고 기온도 적당해서 오곡백과가 여무는데 더없이 좋은 날이 된다. 우리 선조는 “백로에 비가 오면 오곡이 겉여물고 백과에 단물이 빠진다”하여 오곡백과가 여무는 데 지장이 있음을 걱정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사계시(四季時)’중 한 부분을 이렇게 노래한다.
“하얀 이슬 산들바람 가을을 보내주자 / 발 밖의 물과 하늘 청망 한 가을일레
앞산에 잎 새 지고 매미소리 멀어져 / 막대 끌고 나와 보니 곳마다 가을일레”
백로에 접어들면 밤하늘엔 순간적으로 빛이 번쩍일 때가 더러 있다. 농부들은 이를 두고 벼이삭이 패고 익는 것이 낮 동안 부족해 밤에도 하늘이 보탠다고 한다. 이 빛의 번쩍임이 잦을수록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제 제법 아침저녁으로 기온차가 심하다. 기온차가 심할수록 곡식은 더욱 영글어가고 과일은 더욱 아름다운 색깔을 낸다.
이제 추석이 다가온다. 남국의 태양은 마지막 과실을 익히기 위해 하루라도 더 빛을 내 뿜는다. 역시 한가위에는 맛있는 햅쌀과 단맛을 내는 햇과일을 먹을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 추석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벌초, 햅쌀, 햇과일, 보름달, 송편, 제사, 고향, 그리고 민족 대이동…. 벌써 마음은 고향산천에 가 있다.
옛날부터 추석은 설날, 단오, 한식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4대 명절 중의 하나다. 흔히 한가위라고도 하고, 중추절이라고도 하는데, 특히 우리나라 고유어인 한가위는 ‘한가운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의 마음이 보름달처럼 행복의 한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한가위는 고구려, 부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추석의 유래는 지금부터 약 2천 년 전 유리 왕 때부터라고 한다. 유리왕은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살기를 바라는 ‘도솔가’를 지어 부르게 하였고, 그가 일으킨 유명한 것이 바로 길쌈이었다. 유리왕은 길쌈 장려를 위해 6부의 부녀자들에게 내기를 시켰다. 우선 6부의 모든 부녀자들을 두 패로 나누고, 궁중의 왕녀 두 사람을 뽑아 두 패를 각각 거느리게 하고 7월부터 한 달 동안 베를 짜게 해서 8월 보름이 되면 어느 편이 더 많이 짰는지를 판가름 한다. 유리왕과 왕비를 비롯한 궁중의 관리들이 나와 유리 왕이 판결을 내리면 이긴 편에서는 환성을 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진편에서는 그 동안 별미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을 대접하였다고 한다. 맛있는 송편, 기름에 지진 고기, 전 등 갖가지 별식과 밤, 대추, 머루, 다래, 배 등이 푸짐하게 마련되어 양편은 모두 둥그런 원을 그리며 둘러앉아 함께 먹으며 노래와 춤을 즐겼다. 날이 어두워지면 하늘에는 둥근 달이 둥실둥실 떠오르고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밤을 보내기도 했다.
명절은 뭐니 뭐니 해도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절기다. 형제가 모여 햇곡식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애찬을 나누며 하나가 되는 절기다. 오순도순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어느새 고향의 밤은 깊어간다. 이런 만남이 있기에 추석은 누구에게나 가슴 벅차다. 그리고 추석은 누구나 어린아이가 되고 추억의 기차를 타고 동심의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특히 추석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귀성행렬이다. 고향 가는 길은 멀지만 지루하지 않다. 가족이 함께 만나서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 그 하나만 있어도 고향은 이미 눈앞에 와 있다. 이러한 귀향은 연어의 회귀본능 같은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단지 육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영적인 귀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귀의라는 것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달리 말하면 ‘죽는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육신은 영적 성숙을 위해 잠시 입는 체험의 옷이며, 인간의 진정한 고향은 영혼의 고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종말에는 인간 자신의 종말, 즉 죽음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추석에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의 넋을 기리며 하는 성묘도, 결국 언젠가 우리 자신도 저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인생의 모든 것을 추수하는 시기가 지나면 곧 황량한 겨울이 찾아온다. 휘영청 뜬 한가위 보름달의 끝에는 적막한 어둠이 있듯, 그렇게 달도 차면 기운다. 추석명절의 진정한 의미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우리가 언젠가 가야 할 영원한 고향을 미리 준비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