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을 하는 사람이니까 전통음악만 듣고 부르는 것 같아서 모임에서나 노래방을 가면 민요 부르기를 피한다. 당연히 가장 잘 부르는 곡은 민요인데도 불구하고 동행인들이 민요를 듣고 싶다는 요청이 없다면 가요를 부르기 마련이다. 이때 나의 애창곡은 심수봉의 ‘비나리’다. 나는 그녀의 오래된 팬이다. 1978년 그녀가 대학 가요제에 출전 할 때부터 일 것이다. 이후 그녀의 노래가 실린 전축판을 사서 듣고 따라 부르기를 했으니까. 싫증남이 없고 애수에 찬 음색이며 모방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독창적인 발성. 귀에 피로감을 주지 않으며 울림이 있는 가창력. 왜 그녀의 소리가 좋을까? 그러한 나의 우상이 국악인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더욱 그녀에게 집착하게 만든다.
초창기 가야금 산조계에서 혁혁한 공로가 인정되는 심상건 선생이 심수봉의 큰아버지 이시다.
심상건, 가야금의 달인이셨으며 즉흥 연주의 귀재이셨던 산조의 최고봉이시다.
1925년에 충남 서산에서 나시어 1965년에 타계 하셨으며 본관은 청송이시다. 광복 전에 6차례 레코드를 취입 하셨고 1946년 미국 순회공연, 1960년 국악진흥회로부터 국악공로상을 받았고 1962년 정부로부터 문화포상을 받으셨으며 국립국악원 국악사를 지내셨다. 선생의 산조는 은은하고 깊은 산조가락으로 정평 나 있다. 또 연주 때 마다 음악의 골격을 달리 하셨는데 제자와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배운 것을 밤새 연습해 다음날 선생 앞에서 연주를 하면 선생은 그렇게 타면 안 된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수업 받은 것을 녹음 한 뒤 똑같이 연습하여 선생 앞에서 연주하여 확인을 시키니 선생은 “그건 어제 소리지 오늘 소리가 아니야”라고 하셨다고 한다. 이 말씀을 요즘 음악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청송 심씨 집안은 서산에서 국악일가를 이룬다. 내력을 살펴보면 피리와 퉁소의 명인으로 알려져 내려오는 심팔록 선생이 있고 그의 장남은 심상건 선생의 부친 심창래 선생이시며 (국악을 하셨는지 확인 되지 않는다.) 차남으로 심정순 선생이신데 판소리, 가야금, 양금, 단소 등에 능하셨고 심상건 선생께서도 삼촌에게 공부를 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그 심정순 선생께서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는데 심재덕, 심재민, 심매향, 심화영이시다. 이분들과 심상건 선생은 사촌간인 셈이다. 이분들 중 심재덕, 심매향, 심화영이 국악의 명인으로 판소리, 가야금, 무용, 양금 등에 능하시고 음반과 방송활동을 하셨으며 그 중 심재덕 선생이 1남 3녀를 두셨는데 막내딸 민경씨가 바로 심수봉이라고 한다. 선생은 특별히 배우지 않았다는 고백을 하셨으나 산조의 철학이 확고하셨던 분이다. 선생은 산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죄고 푸는 맛’이라고 대답하셨다. 그 죄고 푸는 맛이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나도 5세 때부터 가야금을 만져왔으나 아직도 모를 산조의 묘미이다. 주로 저음을 사용한 정악적인 산조를 즐겨 타셨고 주법이 까다로우며 연주 때마다 새로운 가락이 첨입되는 등 그래서인지 거의 전승자가 없다. ‘한국의 전설적인 가야금 병창의 명인들’(신나라레코드)에 실린 선생의 가야금 병창을 한 번 들어보셨으면 좋겠다. 특히 새타령이 좋다. 육성과 가야금을 함께 감상하실 수 있다. 가야금 병창이란 가야금반주를 하면서 단가나 판소리 대목을 부르는 것을 말하는데 산조 연주 후에 병창을 주로 연주하였으며 이러한 병창의 노래를 석화제라고 한다. 전라도의 판소리와는 다른 충청도권의 소리에 근접하여 설렁설렁하면서 편안하고 시원하다. 선생은 소리에 능하셨고 목청이 맑고 음악성이 넘친다. 심수봉씨의 노래가 집안의 내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시지만 음반을 듣고 있으매 선생을 뵙고 싶은 마음이 사무친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면 소리 한마디 얻어 올 수 있을까.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는 음악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