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에게 서울의 고급호텔은 자신들의 사회적 계급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과시적 성격의 특권을 소비할 수 있는 장소다.”
한국의 아파트를 연구한 ‘아파트 공화국’의 저자 발레리 줄레조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한국학 담당 교수가 이번에는 한국의 고급호텔을 분석했다.
줄레조 교수는 한국에서 호텔 직영 식당이나 스포츠클럽 등을 이용할 수 있는 호텔 회원카드를 갖고 있다는 것은 도시 중산층에게 사회적 명성의 기호가 된다고 말한다.
어느 고급호텔에나 있는 중식당, 일식당, 이탈리아 식당 등은 마치 세계일주를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줄레조 교수에게 고급호텔은 이처럼 서구와 접촉할 수 있는 장소이자 하나의 소우주로서, 사회적 지위를 연출해 무대에 올릴 수 있는 특권을 한국 중산층에게 제공하는 곳이다.
고급호텔 입장에서도 “숙박 부문에서는 외국인 여행객 비중이 절대적이지만, 전체 매출액에서 외국인 투숙객 비중은 절반 정도이고, 나머지는 상류층 고급 사교 문화를 향유하려는 현지 중산층의 소비”로 채워진다.
줄레조 교수를 비롯 7명의 지리학자, 건축사학자 등이 공동 집필한 ‘도시의 창, 고급호텔’(후마니타스 펴냄)은 한국과 일본, 중국, 홍콩 등지의 고급호텔 등장과 사회적 기능 등을 고찰한 책이다.
한국 편을 맡은 줄레조 교수에 따르면 고급호텔의 한국형 모델은 1914년 완공된 조선호텔과 1938년 개관된 반도호텔이다. 이 호텔들은 경제적 중심지인 도시에 세워졌다. 도시는 서구 문물이 가장 먼저 침투하는 곳이다.
먼저 문을 연 5층짜리 조선호텔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의 하나였다. 그곳에는 신고전주의적 무도장, 로코코 양식의 식당 등이 있었다.
미국식 모델로 1967∼1969년 재건축된 조선호텔은 박정희식 발전모델의 산물이자 도심 재개발을 위한 국가정책의 결과로 만들어졌다.
1970년대 들어와서는 당시로서는 도심 최고층 건물인 롯데호텔이 37층으로 완공됐다. 이런 고급호텔은 새로운 도시의 현대성을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줄레조 교수는 “결국 고급호텔은 도시를 이루는 특징이자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도시성의 모델을 동시에 전달하는 도시 개발의 반영물”이라고 말했다. 도시가 고급호텔을 세웠지만, 고급 호텔 역시 도시 건설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책은 1889년 들어선 일본의 데이코쿠 호텔은 귀족주의적 전통이 느껴지는 ‘궁전 호텔’이었다고 소개한다. 이 호텔은 20세기 초반 서양 열강에 맞서 일본의 자주성을 확립하고자 한 천황의 열망을 상징했다.
중국에 지어진 첫 번째 고급호텔인 리쉰더호텔은 1863년 베이징 근처 톈진에 있는 영국 왕실 소유의 조차지에 설립됐다.
책은 “직접적으로 외국에 기원을 두고 있는 아시아의 고급호텔은 문화적 충돌과 경제적 역학관계가 집약되는 장소”라고 정리했다.
양지윤 옮김. 320쪽. 1만7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