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차례, 휘청휘청 파고드는 칼날들!평생 부엉이 울음소리와 함께 살아도 좋다, 하고 어금니를 깨무는 동안, 성한 곳 하나 없는 몸, 만신창이 끝내 견뎌내지 못하고 내 안의 각자 선생이 달려나와, 만신창이 몸 훌쩍 어깨에 들쳐 멘다종아리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검붉은 지렁이들!징그러워하지 마라 지렁이들 꿀틀거려, 너는 아직 살아 있다, 하며 누덕누덕 기워진 몸이 낮게 내게 속삭인다각자 선생이 곁에 있는 한, 번쩍 빛을 발하며, 칼날들 몸속 지나가도 좋다, 하며 상처투성이의 시간이 저 혼자 중얼거린다이윽고 칼날들, 찢겨진 날개째 추락하는 소리 들린다.인간은 살아가면서 상처와 고통과 분노가 깊어져 ‘묵언의 밤’에 잠 못 들어 하기도 한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에 빠져있는 자신을 각자 선생(깨달은 자아)이 용서, 위로, 치유와 구원의 경지로 이끌어주고 마음의 평화를 회복한다고 말하고 있다. 공감되는 시편이 아닐 수 없다. 시인
2020-04-19
아침에 반가사유하던 저 목련, 저녁에 꽃 문을 연다봄날 햇살은 고양이 목덜미 털처럼 따뜻했고바람은 고양이 목을 쓰다듬는 손길처럼 부드러웠다나는 한낮에 나무 그늘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가는저녁에는 꽃그늘에서 빛나는 시집을 읽는다스스로 꽃 문을 열어 빛나는 나무의 연꽃들그 빛에 젖어 함께 부활하는 행간의 아름다운 침묵을무당벌레 한 마리 제 꽃등에 지고 돌아온다세상의 어느 손과 어떤 주술이 꽃 문을 열 수 있으랴꽃의 닫힌 문을 연 봄날 하루는 위대하였으니하루가 경건한 느낌표로 남아 묵상하는 이 저녁땅에는 목련꽃이 하늘에는 별이 불을 밝힐 것이다머지많아 밤 휘파람새가 우듬지로 날아와 노래할 것이다시인이 말하는 저녁은 일반적인 저녁의 의미와 다르다. 저녁은 마무리와 정지, 닫힘과 머무름의 의미를 품고 있지만, 시인은 ‘목련의 꽃 문이 열리고’ ‘스스로 꽃 문을 열어 노래하는 나무의 연꽃’이라 표현하며 저녁을 부활과 생성, 시작과 창조의 시간으로 새로운 인식의 틀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
2020-04-16
손님뿐끝없이들고나는 손님뿐주인 없네둘러봐도부엌으로 방으로 툇마루로 헛간으로오고가도발밑까지 하늘까지 올려봐도주인 없네푸른 산쓰르라미 울음 속에깨어 있는 산주인 없이푸른산속에귀틀집 한 채명아주 바랭이 개여뀌 고마리강아지풀 쇠무릎 질경이기르는서까래 이 우는집…시인의 섬세한 시선은 허물어져 가는 빈집에 가득 찬 공허함과 쓸쓸함에 가 닿아 있음을 본다. 그러면서 우리네 몸도 영혼이 잠시 머무는 집이고 우주 삼라만상 또한 여러 생명체가 잠시 깃드는 집이라는 인식을 펴보이고 있다. 빈집은 정체되고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시인
2020-04-15
뻐꾸기가 울었다 낭산을 도르르 말아 올린다경운기 끌고 탈, 탈, 탈 노랑나비 한 마리 오고 있다노랑나비를 타고 온 낭산 하늘이 잠시 파르르 떤다무논에 콸콸콸 어린 봄이 재충전되고 있다왜가리 한 마리 진흙 묻은 자전거 타고 둑길로 오고 있다뻐꾸기가 울었다 둑길의 애기똥풀꽃이 아장아장봄나들이 간다 뻐꾸기 소리에 낭산이 도르르 풀리고 있다5월의 들판에 넘쳐나는 생동감을 시인 특유의 상상력으로 펼쳐보이고 있다. 선덕여왕 능이 있는 야트막한 낭산을 도르르 말고, 도르르 풀린다는 표현은 시인의 시적 감각이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한지를 말해주고 있다. 시 전체에 흐르는 활기찬 생명력을 읽는다. 시인
2020-04-14
포대기로 아이를 들쳐 멘젊은 엄마버스정류장에서 발뒤꿈치를 든다한 손에 보따리한 손에 교통카드 든 지갑 있구나저물녘의 바람이 차아가는 엄마 등에 뺨을 붙이고담배를 문 남자는저만치 떨어져서 선다착한 곳으로 가는 버스는걸음도 느려추수가 끝난 너른 들판이어두워지려 한다한적한 시골 정류장의 풍경을 본다. 풍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행위들이 무심하게 그려져 있다. 서로 연관시키지 않고 쓸쓸하고 외지고 어두운 풍경을 제시하며 시인은 주관적 인식의 개입 없이 담백한 목소리로 쓸쓸한 그림 한 장을 그리는 것이다. 시인
2020-04-13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꽃이었다 한다잎이나 줄기다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했겠다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속내를 드러내고 있음을 본다. 당신과 한몸일 수밖에 없고 한 몸이 되고 싶어 하는 간절한 사랑과 바람의 마음이 숨겨져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시다. 시인
2020-04-12
줄 것 다 주어 버리고도발에 걷어차이는 게 개 밥그릇이다뺏길 것 다 뺏기고 노리개로개가 잘근잘근 씹어 대는 것이개 밥그릇이다밤이 늦어 귀가하다 보니세월에 걷어차여 개 밥그릇으로어둑한 구석에 나뒹구는 아버지평생 허기진 개 밥그릇 아버지세상의 모든 아버지유년 시절을 필자와 이웃해서 자라난 시인은 성품이 너그럽고 정직했으며 강직하며 의지가 굳은 소년이었다. 6·25때 피난 와서 우리 동네에 터 잡고 살아온 시인의 가족을 잘 알고 있는데, 시인의 아버님은 매우 생활력이 강한 분이었다. 시인은 가족을 위해 평생을 노동하며 살다가 이제는 나이 들고 병들어 쇠락한 아버지의 모습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땅 아버지들의 모습이 아닐까. 시인
2020-04-09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를 지내다 보면갑작스레 나는 과일에 관심을 갖는다왜 대추와 밤과 배와 감을 필수적으로제사상 맨 앞자리에 놓는가생각해 보니 이 제사상에서 과일만이 죽지 않았다죽은 사람의 식탁에 산 생명이 앉아 있는 것이다(….)부모가 다 키운 자식을 세상에 내놓듯이나는 죽은 아버지를 이미 오래전에 버리고는살아 있는 과일들에게 넙죽 절을 했다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며 시인은 죽음보다는 삶에 절하는 역설을 펼쳐보이고 있다. 조문 차 상가에 가서 망자의 사진 앞에 선 사람들은 망자 앞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절실히 느끼고 오는 것은 아닐까. 제사는 죽음을 기리는 행위다. 시인은 죽음을 기리면서 삶을 확인하고 삶에 대해 깊이 천착하고 있음을 본다.시인
2020-04-08
점심 무렵쇠줄을 끌고 나온 개가 곁눈질로 걸어간다얼마나 단내나게 뛰어왔는지힘이 빠지고 풀이 죽은 개더러운 꼬랑지로 똥짜바리를 가린 개벌건 눈으로 도로 쪽을 곁눈질로 걸어간다도로 쪽에는 골목길이 나오지 않는다쇠줄은 사려지지 않는다무심코 지나치는 차가 일으키는바람에 밀려가듯 개가 걸어간다늘어진 젖무덤 불어터진 젖꼭지쇠줄을 끌고 걸어가는 어미 개도로 쪽에 붙어 머리를 숙이고입을 다물고 곁눈질을 멈추지 않는다하염없이 꽃가루가 날린다시인은 쇠사슬에 묶인 채 한정된 영역에 갇혀 있던 개가 주인의 굴레를 탈출해 도망가는 풍경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 개는 주인에게 철저하게 복속된 존재인데 인간 또한 저항과 소통 없이 어떤 규례나 법, 규범과 규칙에 복속된 것이다. 시인은 그런 부조화와 불균형으로부터의 탈출과 극복, 해소를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4-07
장맛비 그치고햇빛 쨍쨍한 한낮에아래 소락떼기 마을상여 하나 떠간다어이 어이 어이야 어야 어야호박잎은 오갈 데 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아잎을 축 늘이고 있는데하늘로는 연습 비행기 한가롭게 날고매미는 울고철 늦은 석류꽃은 저 혼자 붉은데노오란 햇빛 속을상여 하나 떠나간다어이 어이 어이야 어야 어야벌써 슬레이트 지붕은 훅훅 달아나도 산 그늘이나 찾아갈까차라리 땡볕에 호미질이나 할까땀이 흐르기 시작하는데꿈속인 듯 멀어지며상여 하나 떠나간다어이 어이 어이야 어야 어야한여름 들판에서 일하는 시인과 상여 하나가 떠나가는 풍경을 본다. 삶과 죽음이 적막 속에 어우러짐을 본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는 연습 비행기와 느리디 느리게 들판을 건너가는 상여를 대비시키며 엄청나게 가속도가 붙어가는 현대문명에 대한 경계와 함께 상여가 떠가는 들녘에 흐르는 느린 시간을 옹호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20-04-06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처음 맺히는 열매는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을 닮아 갔다후일에는 기구하게 폭삭 익었다윗집에 살던 어럼한 형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숫기없는 나도 이 나무를 좋아했다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개복숭아 나무는 먹음직스러운 크고 맛난 열매로서의 기능이 상실된 나무다. 열매는 작고 볼품이 없으며,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나무다. 그런 나무에 윗집 어럼한 형이나 숫기없는 나까지 좋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세상의 관심과 눈길에서 멀어져 있으면서도 늘 그 자리에서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소의 둥근 눈알 같은 열매를 매다는 정직하고 성실한 개복숭아 나무의 삶과 운명에 동병상련 같은 느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시인
2020-04-05
창문에 뭉툭한 손이 내려오네시골에서 보내온 감자를 삶아 먹는 밤, 어머니 한숨 한 꺼풀 벗겨지네새벽을 기다리네거미가 가등에 달라붙어 새벽이 터지는 빛살들로 날개 한 벌 짜려고 하네꼼짝도 않고 기다리네먼 훗날, 감자 껍질을 벗겨 희디흰 속살 먹는 소녀의 창가를 엿보리무서리 저리 내리는 날날개를 반쯤 펴고젖어서, 가만히 딸의 창문에 비치리시골에서 어머니가 보내온 감자를 삶아 먹으며 시적 화자는 훗날 자신의 딸 또한 무서리 내리는 날 밤 시골에서 보내온 감자를 삶아 먹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밖에는 그 옛날 어머니의 모습으로 하현달이 떠 있는데 시인은 운명적 내림을 떠올리며 슬픔과 그리움이 스민 애잔한 그림 한 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4-02
새들이 눈보라처럼 까맣게 솟구쳐 올라허공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밤바다는 느리고 무겁게 가라앉았다흐려져, 아주 캄캄해진 수평선 저쪽에눈부셨던 흰 침묵들 스러진다허무는 검다검은 허무는 황홀하여나비 눈썹 같은 지난 시간들끌어안고 캄캄한 곳으로가라앉는다시인은 바다에 어둠이 몰려와 새들이 허공에 날아오르고 사위가 검은 어둠에 젖어들어 내려앉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검은 허무는 충일한 생명의 시간을 품고 있는 것인데 시인은 쉬 드러나지 않는 생의 비의(悲意)를 언급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20-04-01
제깐엔 가마니 같은 눈을 뜨고도 성에 안 차 하는족족 늦둥이 애한테 통박이다마수걸이에 호되게 구시렁거리는 아범이다봄 햇살에 내놓자 바구미들이 구탱이로 몰렸다겨울 한철에 정미소 기둥이 한쪽 내려앉았다구덩이에서 무를 꺼내나 반 썩어질 양정미소가 제 폼을 찾으려면 먼데서 여럿 와야 할 모양이다바구미 등처럼 까맣게 빛나는봄날 오후의 하리 下里 정미소겨우내 한산했던 정미소에도 봄이 찾아왔다. 시인은 아들을 통박 주는 늙은이와 묵은 쌀에 생기는 바구미의 동작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바구미 등처럼 까맣게 빛나는 봄날 정미소의 생동감 넘치는 풍경 한 장을 우리에게 건네 주어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해 주고 있다. 시인
2020-03-31
봄의 눈이 마구 내어 밀 듯 새내기들이 얼굴 내민 교정단정한 화단의 매화나무가 웃음을 한껏 매달고 있다갑작스런 추위와 마른 바람에도 등굣길 페달이 둥근 아침교문을 지나 언덕 오르기란 5교시 졸음보단 낫지만식사 후 배를 쓸어내리는 양지 바른 곳에겨우내 없었던 꽃그늘이 생겨까치 두 마리 총총 뛰어 다닌다갑자기 친해진 두 녀석에게 묻는다어째서그냥요 그냥 좋은 걸요녀석의 미소가 포르르 가지 위로 날아가서매화꽃이 되었다그늘이 다 환하다이른 봄 매화꽃이 벙그는 교정의 희망차고 정겨운 풍경 몇 장을 본다. 새 학기 꽃망울같이 귀엽고 생기 있는 새내기 신입생들의 모습이랑, 꽃그늘에 날아오는 까치랑, 시린 눈물방울 같은 매화꽃이랑 시인의 눈빛 마음길이가 닿는 곳마다 가볍고 밝고 고운 생명의 새순이 피어남을 본다. 희망 크다. 시인
2020-03-30
어떤 옥탑방에는 밤사이 신발이가지런하다집 나간 아들이 몰래 들어와잠만 자는 것이다물론 그 집 식구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청년이 화가지망생이란 것도놀랍지 않다그 집 옥상에서 열린 전람회는얼마나 많은 색깔을 구워냈던가양치식물과 빗방울은그에겐 푸른색에 가까운 내재율이다비밀이 시작하는 것이다간혹 내 중년도 청년에 의해 푸른 추상화가 되곤 했다그곳이 머위잎 녹음처럼 부드럽기에셀로판지를 통과하는 햇빛은다시 햇빛의 바늘귀를 지나간다그건 생의 조름을 깁는다옥탑방의 목록에 새털구름이떠다닐 무렵청년은 보이지 않았다그 자리에 물탱크가 들어선 것도그쯤이다나도 한때 청춘을 어딘가 구겨 넣었지만노란색 물탱크는 비가 오지 않아도안간힘으로 새 것이다화가 지망생이 살던 옥탑방이 철거되고 물탱크가 섰다고 말하는 시인은 청년이 그린 그림의 푸른색이 물탱크의 노란 색으로 변한 데 시의 중심을 두고 있음을 본다.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청춘의 시간을, 그 열망의 시간마저 쉬 지나가버리는 세월의 허망함을 아파하는 것이다. 시인
2020-03-29
산을 넘었습니다들로 오시지요 할머니까마귀 떼 속으로요할머니께서 처녀적 꿈 얘기를 하신 그 가을날 한 마리씩 산 넘어간 까마귀들 여기 다 모여 있네요. 발갛게 달아오른 지평선, 실개울 타다 남은 하얀 실연기 자국, 그 아래 잠겨가는 마을에서 해를 품고 살고 싶다 하셨지요? 들 가운데 까마귀떼 내리는 곳이 그 마을 아니겠냐 하셨지요?까마귀떼는 마을과 거리를 두고들고 넘어가네요까마귀 날개 밑에할머니의 지평선 마을이 깃들어 있었네요들로 오시지요 할머니다시 날아오는 까마귀 떼 속으로요시인이 연출해 내는 지평선 마을은 들 가운데 까마귀가 내리는 곳에 있다. 통상 까마귀는 흉조로 등장하지만 이 시에서는 할머니라는 모성과 잘 어우러지는 존재로 등장함을 본다. 시인은 정겹고 따사로움이 있는 평화로운 안식의 공간으로서 까마귀가 날아오는 지평선 마을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3-26
새들은 망명정부를 꿈꾸며 비행한다머리 둘 곳 하나 없는 세상어쩌면 이 비행이 멈추지 않을지도 모르는데떠남에 익숙해져버렸다갈망의 주머니를 안고 사는 유목민처럼내 가진 것이라곤 모래바람을 막을 수 있는 모포 한 장과반가운 손님을 대접할 말 우유 한 잔이 전부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연녹빛 잎사귀들의 속삭임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창연한 가을빛에 넋을 잃었던 곳안온한 둥지에 세월을 묻었다바람에 허리가 꺾인 어느 겨울날눈의 무게를 못 이겨 뚝 뚝 비명을 지를 때소리의 굉음을 피해 도망치고 말았다새들은 망명정부를 꿈꾸며 비행한다유전자 속에 각인된 본능이기억속에 흐려지고 찢겨져 나가길 기다리며새날의 새 둥지를 찾아무정부주의자는저무는 햇살을 등에 업고 장엄하게 날아오른다이 시에 나오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이 찾아 떠나는 ‘망명정부’는 어딜까. 그곳은 진정한 자유가 있고, 신과 인간이 공존하며 어떤 부조리나 불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리라. 정의와 사랑이 존재하고 언제든 비상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그런 곳은 현실 속에 있지 않으므로 인간은 끝없이 그곳을 열망하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
2020-03-25
수술실 안으로 철가방이 들어간다전화선처럼 꼬인 장을 푸는 건 간단하다고 했다수술은 세 시간을 넘어섰고배고픈 의사들을 위해 자장면이 배달되었다장을 풀다 말고 돌아앉아(혹은 열린 내장을 들여다보며)그들은뒤엉킨 창자 같은 면발을 급히 빨아들일 게다(….)이윽고피곤을 마스크처럼 뒤집어쓴 집도의가수술실 밖으로 걸어 나온다(….)수술복 앞자락에 남아 있는부패하기 시작한 내장 냄새와 담즙 빛깔 자장 소스생사를 넘나드는 수술실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한 장면을 펼쳐 보이면서 시인은 죽음과 일상이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는 일상의 무심함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섬세한 눈은 담즙과 핏자국이 자장 소스의 빛깔과 닮아 있다는데 이르러 이러한 무심함과 무관심을 극대화 시키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20-03-24
설풋한 모과 하나를 주워다가책상에 올려놓았다저 흉중에도 들고나는 것이 있어색이 돋고 향기가 난다둥근 테두리에 들어 있는한 켠 공중(空中)가끔 코를 대고흠, 들이마시다 보면어릴 적 맡은 어머니 겨드랑이 냄새가 났다모과의 얼굴 한쪽이 조금씩 썩기 시작했다모과 속에 들어 있던 긴 시간한여름의그늘 냄새, 매미 소리내 방 허공 중에매일 하루치의 제 것을 조금씩 꺼내 피워두던모과 하나가말끔히 한 몸을 태워검은 등신불로 앉아 있다시인은 책상 위에 놓여 조금씩 썩어가는 모과를 바라보며 모과의 생육과 결실, 소멸의 과정에 스며든 그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 이를테면 햇빛과 물, 시간과 누군가의 관심과 시선 같은 것들의 작용이 이루어 낸 향기롭고 탐스러운 열매에 이른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말끔히 한 몸을 태워 검은 등신불로 앉아 있다’라는 마지막 표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