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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지방시대 명절날, AI가 밉다

정태옥​​​​​​​​​​​​​​​​​​​​​경북대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장 나는 경북 영일군(지금은 포항시) 어느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내가 1~2학년 때쯤 다니던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에 졸업식이 열렸다. 이 골짝 저 골짝 촌로들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식장을 가득 채웠다. 교장 선생님의 거창한 식사에 이어 5학년 언니의 송사(送辭)와 졸업생 누나의 답사(答辭)가 이어지는데 온 식장 안이 눈물바다였다. 아예 엉엉 우는 졸업생 누나들에 영문도 모르게 나도 따라 울었다. 졸업하는 언니들이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는지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알게 되었다. 그 시절 우리는 너무 가난하여 여학생의 초등학교 졸업은 사실상 사회생활의 끝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몇 년간 집안일을 돕다가 시집가서 육아와 가사 일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다. 70년대 경제성장이 본격화되면서 그 서럽던 소녀들이 도회지로 대거 몰려나와 섬유와 전자공장에 취직하고 공장 부설 야간 학교를 다니면서 시골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명절이 되면 그 누나들은 선물셋트를 들고, 형님들은 포니 자가용을 끌고 고향을 찾아왔다. 명절날 시골은 그야말로 잔치집이었다. 그들이 간 곳이 굳이 서울 구로공단이나 성수동 공장도 아니었다. 대구 제일모직과 구미 삼성전자, 울산 자동차 공장이었다. 21세기를 AI가 주도하는 첨단산업시대라고 한다. IT(정보), CT(통신), BT(바이오), NT(나노), ET(엔터테인먼트)가 주력이다. 이들 산업이 지방 소멸을 부추기고 있다. 20세기의 주력산업이 섬유산업을 거쳐 철강 자동차 조선 전자 화학 등 중화학 산업이다. 중화학 산업은 본사는 중앙 정부와 가깝고, 해외 무역에 유리한 서울에 둔다고 해도 공장은 지방에 두었다. 넓은 공장부지가 필요하고 항구가 가까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수도권 집중이 심했지만 울산 포항 구미 거제 광양 같은 곳도 번성했다. 한때 울산의 GRDP가 서울을 능가하고 거제의 물가가 서울에 버금갈 경우도 있었다. 불균형적이기는 해도 지방도 개평으로 먹고살만 했다. 첨단산업시대에는 지방이 없다. 일단 대규모 공장용지가 필요하지 않다. 공장이 필요하더라도 굳이 애국심에 불타 지방에 지을 필요가 없다. 베트남이나 폴란드에 지으면 된다. 첨단산업시대에 필요한 것은 머리 좋은 인재다. 인재는 좋은 대학이 몰려 있는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소득 수준도 높아 여가와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곳에 살기를 원한다. 수도권 집중에 따른 폐해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의 대부분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 간 청년도 수도권 집값이 너무 높아 결혼하기가 힘들고 애기 키우기가 힘들다. 출퇴근하기 힘드니까 선진국 문턱이라지만 인생은 고달프다. 지방은 노인들만 살아서 마을회관 청년회장이 68세다. 복숭아꽃 살구꽃 꽃대궐 우리 고향에는 스러져가는 빈집과 기름진 문전옥답에 녹음방초만 우거져 있다. 그 사회적 비용은 엄청나다. 그 비용을 지방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해결책은 명확하다. 지방에 더 좋은 대학을 만들어 머리 좋은 인재들을 지방에서 키우고, 그 인재들이 지방에서도 즐겁게 살 수 있도록 투자해야 한다. 왜 국민이 다 같이 내는 세금으로 국립 미술관, 박물관, 오페라 하우스를 서울에만 짓는가. 나는 보름달이 훤하게 뜬 명절날 AI가 밉다.

2024-09-19

변학도 재판과 지방자치

정태옥 ​​​​​​​​​​​​​​경북대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장 유럽이나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한적한 시골에도 꽤 크고 아름다운 성 (城)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이 있었다는 것은 살아있는 권력(귀족)이 살았다는 뜻이다. 서울을 벗어나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산사(山寺)를 제외하고 변변한 역사문화재를 찾아보기 힘들다. 양반의 고장이라고 자랑하는 경북에도 류성룡 가(家) 외는 판서댁 하나 없다. 몇몇 서원이 남아 있지만 벼슬길 끊어진 선비가 낙향하여 주변 농민들 힘으로 세운 것들이다. 요약하면 우리 역사에 지방에는 변변한 권력(권한)이 제대로 없었다. 필자가 지방시대위원회 토론회를 갔을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왜 지방분권이 잘 안되느냐’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봉건제를 비롯한 지방자치의 경험도 개념도 없었다. 지방은 그저 중앙에 예속된 존재였고, 중앙에서 파견된 벼슬아치가 생처녀를 잡아다가 ‘네 죄는 네가 알렸다’하면 머리를 조아려야하는 존재였다. 그 해결책도 중앙에 가서 출세하고 중앙권력에 의지한 이도령에 의해서 한풀이가 가능했다. 21세기 지금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나라가 거두는 500조쯤 되는 세금 중 국세가 80%, 지방세가 20% 정도 된다. 그런데 실제 집행은 지방자치단체를 통하여 집행되는 것이 전체 예산 중 60% 정도다. 즉 중앙정부가 거두는 세금 중에서 40%는 지자체에 주어서 집행된다는 뜻이다. 중앙정부가 거두어 지자체에 나누어주는 세금은 용도와 사용 대상을 모두 중앙정부가 정해서 내려보내준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단체 예산 중에서 70% 정도가 복지 예산인데 거의 100% 중앙정부가 정해주는 용도기 때문에 지방에는 재량권이 하나도 없다. 나머지 30% 예산도 중앙정부가 하고자 하는 사업에 소위 매칭펀드로 다 들어간다. 지방자치단체는 인건비 빼고는 거의 한푼도 쓸 돈이 없다. 문제는 이와같은 제도 뿐 아니라 우리 국민의 무의식도 지방을 차별하고, 열등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TV에 지방이 나오는 것은 시골 할머니들이 서울서 온 연예인이나 손주에게 토속 음식 만들어주는 장면 외는 없다. 서울 외는 모두 시골이고 그저 토속 음식이나 해서 서울 손님 대접하는 곳으로 인식된다. ‘춘향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구 경북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와서 소위 출세하여 서울에 사는 선후배들조차 무심코 하는 말이 차별적이다. ‘우리나라 같이 작은 나라에 지방마다 공항이 필요한가’한다. 서울에서는 한시간만에 공항가서 외국 가고, 지방에서는 새벽부터 네시간 다섯시간 허겁지겁 인천공항 가야 된다는 말인가. 소득 3만불이 넘는 인구 500만인 대구경북에 국제공항 하나 가지는 것이 그렇게 국가적 낭비인지 모르겠다. 대구경북 통합하자고 하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도청사 어디 두는지, 대구 경북 누가 이득인지만 관심이다. 대구경북 통합의 핵심은 통합할 테니 예산 더 나누어 가져오고, 중앙정부가 가진 과도한 권한 나누어 달라는 것이다. 그냥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수도권과 경쟁 가능한 규모로 키우고 기획 기능도 대폭 살려서 지방도 좀 자율적으로 잘 살아보자는 뜻이다. 힘 좀 모으자.

2024-08-29

다민족 나라 대한민국

정태옥 ​​​​​​​경북대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장·교수 세계사를 들여다보면 제국의 발전에는 한가지 패턴이 있다. 한 민족이 발전하여 군사력이 강해지고 경제와 문화가 융성하면 필연적으로 그 주변 이민족과의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면 제국으로 성장했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지리멸렬하다가 망했다. 높고 큰 성을 쌓기도 하고 정복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땅덩이가 커져 제국이 된다는 것은 다민족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제국의 발전은 이들 다민족들과 잘 화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기존 단일민족과는 전혀 다른 창조적 제국으로 발전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2010년,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는 ‘리콴유가 본 세상’이란 책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출산 여성에게 아무리 돈을 많이 주고 여성 복지를 잘해도 저출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저출산의 근본 원인은 여성의 학력이 높아지고 사회 참여가 많아지는 것이므로 돈을 주고 복지를 늘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결책은 이민이라고 꼭 짚어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 아예 거론하지 않고 저출산이 심각한 일본과 싱가포르의 예를 들며, 이 두 나라의 공통점은 이민에 소극적이라는 것이다.서구 선진국들도 원래 원주민을 중심으로 보면 저출산인데 이민을 계속 받아들이기 때문에 저출산 고령화가 문제 되지 않는다. 이민 자체가 인구를 늘리고 이민 1세대와 1.5세대는 출산율이 높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이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두 가지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싱가포르가 수용가능한 적정규모의 이민을 받아들여야 한다.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싱가포르 다문화에 적응력을 높이기 위하여 사회제도를 개선하고 국민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우리나라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수백조 원을 투입했다. 요즘은 대통령실에 수석비서관 자리를 만들고 부영기업은 출산 직원들에게 1억원씩 나누어 줄 거고 서울시는 어린이를 가진 직원들은 의무적으로 매주 하루씩 재택근무를 시킬 거라 한다. 기본적인 내용은 현금이나 복지를 늘리는 것이다. 일부 필요한 제도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해서 저출산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해결책은 양질의 감당할 만한 수준의 이민을 받아들이고 이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땅덩어리는 예전과 같지만 이제 더 이상 소득 1000불 시대의 백의민족 대한민국이 아니다. 경제 영토로 보면 10대 경제 대국이고, 올림픽 메달로는 5~6위 하는 큰 나라다. 세계인이 한국식 라면을 먹고 한국 여권으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나라가 190개국이 넘는다. 남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드는 제국이 아니라, 이미 다민족이 모여 아웅다웅 살아가는 경제문화적 제국이 된 대한민국이다. 물건만 외국에 팔아먹는 이코노믹 애니멀이나 북한식 우리끼리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저출산 해결을 위한 수단적 다민족 국가가 아니라 나라의 규모가 커지고 무역과 문화의 교류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다민족 국가를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자.

2024-08-08

TK와 웅도 경북(雄道 慶北)의 추억

정태옥​​​​​​​경북대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장 지난 대선 시절에 홍준표 후보는 풍패지향(豐沛之鄕)이란 말을 했다.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이 풍읍(豐邑) 패현(沛縣)에서 유래하여 제왕의 고향이란 뜻으로 대권 쟁취와 고향 발전의 의지를 드러낸 말이다. 6~70년대 대구 경북은 한 몸이었다. 당시 전국체전 캐치프레이즈가 웅도 경북(雄道慶北)이었다.실제 부산과 경기도를 멀리서 따돌리고 서울 다음의 위상을 떨쳤다. 대구경북은 땅도 넓었고 인구도 많았고 산업 생산력도 대단하였다.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구미전자산업과 대구섬유산업은 산업 입국의 상징이었다. 영호남 갈등의 근저에는 대구경북의 남다른 발전이 깔려 있었다.당시 TK출신 위상도 대단했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TK는 대구경북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서울에서 열리는 경북고등학교 총동창회를 가리키는 용어였다고 한다. 경북고등학교의 일제시대 전신이 대구고보였다. 경북고등학교 총동창회에는 대구고보와 경북(중)고등학교 출신들이 다 모였는데 그들의 앞 글자를 따서 TK라 부르고 아예 대구 경북 사람들을 TK라 일컫고 삼김(三金) 시대에 들어서면서 부산경남 사람들을 PK라 부르면서 지역 명칭으로 변했다 한다.내노라하는 정치인들도 가득하였다. 요즘 다른 지역 정치인들이 대구경북 사람들을 아무리 비하해도 찍소리 못하고 공천에 목메다는 비겁한 정치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서울에 갔을 때 남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대구 경북이라고 답할 때는 은근 자부심도 한 줌 들어가 있는 대답이었다.세월은 흘러 이제 대구경북은 몰락과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구와 경북은 쪼개어지고 산업 경쟁력은 떨어지다 못해 형편없이 되었고, 정치적 발언권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여당 당대표 선거 때나 찾는 곳이 되었다. 서문시장은 다급한 보수 정치인들이 찾아와서 보수를 지켜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해 놓고 돌아서서는 웃어버리는 웃기는 동네가 되어 버렸다. 대구경북은 그들이 서울 가서 대구경북 발전을 위한 법안이나 정책에는 철저히 외면하는 허언(虛言)의 고장이 되어 버렸다.최근 얼마동안 대구경북을 위한 법안 한 두 개는 그들의 힘이 아니라 전라도 광주의 힘을 빌어 겨우 통과 됐다.최근 다시 대구와 경북을 통합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실제 대구경북에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도 깔려 있다. 그래도 나는 기대를 한번 해 본다. 가장 큰 이유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제 산업경쟁의 단위가 국가에서 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의 경우도 중부 내륙의 러스트 벨트(Lust Belt)라고 하는 전통적 산업도시 지역과 태평양과 대서양 해안지역 쪽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다르다. 대구경북도 합하여 규모를 키우고 독자적 산업 정책을 펼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고 21세기 첨단 산업시대에 알맞은 신산업을 창출해야 한다. 한때 잘 나가던 대구경북의 위상이 쪼들어진 원인은 수출주도형 산업시대에 항구가 없었기 때문이다.21세기에는 항공 물류의 비중이 많이 높아졌다. 대구와 구미에서 미국 한번 출장 가려고 새벽 5시에 출발해서는 지역 경쟁력이 있을 수 없다. 디지털 대전환 시대를 준비하는 신산업 정책도 필요하다.덩치만 크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성은 열린다. 나는 기대해 본다.

2024-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