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 스님(전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장) 한국불교가 처한 상황은 매우 암울하다. 한치 앞을 볼수도 없는 지경이다. 사회적 이슈나 문제가 불교안에서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시점이라 해야 한다. 신도들의 고령화는 이십년도 더 전부터 꺼내들던 아젠다 였으니 이젠 초고령화를 넘어 50대 40대 신도조차 아예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는 지경이며, 승려들간의 부익부 빈익부의 문제도 보통의 수사로는 표현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항간에 널리 퍼진 수백억원의 자산을 보유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최저 임금도 받지 못하고 사찰의 염불과 의식을 맡고 있는 부전스님들은 하루 몇 시간을 공 염불을 하며 그야말로 불안한 노후나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이 하루 하루 연명할 뿐이다. 불교의 고질적 병폐는 전국의 교구 본사에서 맹위를 떨치는 몇몇 권승들이 군웅할거하듯 나눈 이권과 종단의 거대한 이익을 앞두고 벌이는 이합집산이 원인이다. 한줌도 안되는 그들의 이해관계와 힘의 논리에 대다수의 대중스님들은 생존 자체도 버거운 현실이다. 그러나 어두울수록 검푸른 밤하늘에 별이 밝게 빛나는 법이다. 이 시대의 어둠에 처한 불교에는 진정한 스타가 없다. 고작 가볍고 천박하거나 철학의 빈곤한 또는 빈약한 사상으로 무장한 이들이 회통을 치는 '아수라 판'이라고나 해야할 시점이다. 세상이 나날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으로 첨예화 지고 계급 모순이 발생하듯 부처의 평등사상을 실천하다는 구실로 출가를 한 승려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시급해 부수어야 한다. 불교 위기의 극복은 부자 절과 가난한 절의 주지 임기를 2년 정도로 하여 순환하고 두만기 세만기씩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노름장의 잭팟 터지듯 상상할 수도 없는 수십억대 사찰의 주지는 전권을 다가지고 거액을 사유화 해도 어떤 제재를 가할 수 없는 제도적 문제에서 발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원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쓰여져야 함에도 비 민주적이고 몰지각한 권승들의 권력구조 개편 없이는 불가능하고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종단 행정의 전면적 혁신 없이는 불교 개혁이나 당면한 현실적 대안도 부재된 상황이다. 교구의 맹주몇,교구장 이십여명,교구를 대표한다는 중앙종회의원, 상원격의 원로의원,종단의 실,부장급고위직 승려 등 채 백여명 남짓한 대표적 권승들의 작태로 불교가 망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세속보다 더 세속적인 불교는 가라 앉고 있지만,권승들은 태연자약하게 멀뚱이 가라 앉는 불교에서 그들위 먹거리인 재물과 자리만 탐하고 있다. 전면적인 체질 갸선을 위해서는 조직적이고 혁신적인 불교 시민 사회 운동이 개진 되어야 한다. 다 쳐부수지 않고는 불교 본연의 가르침은 마구니와 그들을 따르는 잔당들의 이권 카르텔에 더욱 잠식할 것이며 이시점에서 양식 있는 불자들은 이들을 고사시키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계획하여 전면전을 선포해야 마땅하다. 한 대오를 만들고 힘을 모아 전력 질주하여 불교 개혁의 기치를 올려야 할 마지막 시점이다.
2025-03-01
남도의 어느 외로운 섬의 빈 절로 훌쩍 내려간 어느 벗이 동영상으로 마당에 쌓인 눈을 비춰준다. 작년 여름 위암수술을 하기도 했던 그다. 올 한해 건강했으면 한다. 서울에 올라오면 일주일도 채 안 돼 내려가는, 이제는 섬사람이 되어버린 벗은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끼 발동이다. 나이 들면 반드시 필요한 병원도 마트도 먼 첩첩산중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그가 약간은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럽다. “어서 마당에 쌓인 눈이나 좀 쓸어”하니 “곧 녹을 텐데 뭐”하며 게으름을 떨려한다. 어제는 서울에서 재를 마치고 나오는데, 손발이 얼어 깨질듯 한 강추위를 더는 참지 못하여 재빠르게 돌아왔다. 오늘 중으로 아마 벗은 심심하여서든, 생활에 불편을 느껴서든, 빗자루를 들것이다. 그는 쌓인 눈을 쓸다가 숨을 고르며 우두커니 서 있을 것이다. 빗자루를 세워두고는 지난 세월이 그립거나 지우려고 곧 녹을지도 모르는 눈 위에 누군가의 이름 석 자를 쓸지도 모른다. 얼은 제 몸이나 화르르 군불에 녹이려 군고구마를 굽고 쉰 김치에 막걸리 한 병에 얼큰히 취해서 허무와 고독에 몸부림 칠 지도, 살아가며 나이를 먹어가며 얻어낼 수 있는 건 딱 혼자라는 사실밖에, 살아간다는 건 결국은 버리는 연습이다. 명예도 권세도 가족도 지인도 사랑도 증오도 더 버릴 것이 없어질 때엔 홀가분하게 내 몸조차도 버리는 것이 인생의 수순이다. 이렇게 다 버리면 하늘의 뭉게구름처럼 흘러가는 강물 같은 과거와 그리고 현재, 미래도 어느 날 모두 허무의 바다로 첨벙 사라질 터이다. 나는 사랑하여서 집착하지만, 떠나려는 너를 잡아두는 미련은 접자라는 공식을 비로써 깨칠 때, 한 세월이 더없이 홀가분해 질 테지.
2025-02-04
혐시탕척(嫌猜蕩滌) 훼예하류(毁譽何留) 초연탈생사(超然脫生死) 금오철천비(金烏徹天飛) 미움 싫어함 깨끗이 씻어 버리니 헐뜯고 칭찬함이 어디에 머물겠는가 초연히 삶과 죽음을 해탈하려니 금까마귀 하늘 뚫고 비상하네 이러한 열반송을 뭇사람들에게 남기시고 법랍 60년 세수 76세로 사바를 떠나신 종상 큰스님.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비구승 최고 법계인 대종사(大宗師)에 오르신 우리시대의 진정한 어른이셨다.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 전북 임실에서 출생하시어 더벅머리 총각은 열일곱 나던 해 속리산법주사(俗離山法住寺)에서 월산(月山) 스님을 은사(恩師)로 사미계(沙彌戒)를, 1973년 석암(錫岩) 스님을 계사(戒師)로 구족계(具足戒)를 수지하시고,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 (敎是佛語)라, 선은 곧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니, 속세와 멀어진다는 속리산, 법이 상주한다는 법주사의 전통 강원에서 ‘부처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마치시고 조계종 총무원의 조사국장(1980), 총무국장(1985)을 필두로 입법의결기구인 중앙종회의원(8,9,12,14,15대)을 장장 5선을 지내시고, 연주암 주지, 청계사 주지, 불국사 주지, 석굴암 주지, 불교방송과 동국대 이사를 역임하셨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도 큰 역할을 하시었고 남북한 관계의 긴장완화와 화해무드 조성에도 그 공로가 매우 크신 분이다. 지은 책으로는 ‘기와를 갈아서 거울 만들기’(청계사, 2001)를 남기셨는데, 건물 짓고 탑 조성하는 일보다 사람 키우는 불사에 원력을 모아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을 대화하시듯, 평이하게 그리고 진솔하게 설하신 것이다. 아마 선지식께서는 한국불교의 쇠퇴를 미리 점치셨는가보다. 탄탄 스님·전 불교중앙박물관장 사람 귀하게 여기지 않은 한국불교의 현실은 이제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이 또한 상응하는 과보가 맞다. 몇몇 지역 맹주들이 농단해온 우리 교계의 미래 또한 어둡고 불투명하기만 하다. 살아생전 베풀고 나눈 것만 고스란히 남고 탐착하여 빼앗은 허물은 영원할 뿐이다. 대궁당(大弓堂) 큰스님께서는 지나는 객승도 불러 세워 성큼 거액의 지전(紙錢) 한 묶음을 나눠주시고 늘 어렵고 힘든 불자에게는 한없는 은전(恩田)을 베푸셨다. 학인에게는 학비를, 세도가에게는 헌금을, 적재적소에 재물을 풀어 교계 안팎에서 그 칭송이 자자했다. 이만한 복인(福人)은 이 지상에 또 있을 것인가? 남 종상(南 宗常) 북 자승(北 慈乘) 시대가 이제는 저물었다. 때마침 계절이 완연히 바뀌는 겨울의 문턱에서 하필 조계종사에 큰 획을 그은 종문(宗門)의 대사판(大事判) 두 분의 기일(忌日)이다. 전생(前生)은 신라시대 김대성의 화신(化身)이신듯 대가람 불국사와 석굴암을 오늘 지금까지 가꾸고 지키셨으며 금생에 그토록 널리 베푸셨으니, 이제 속환사바(速還娑婆)를 하신다 하여도 원 없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을 다시 누리실 우리시대 진정한 큰스님이셨다. 훤출한 대장부풍의 법당(인물)이며 통 크신 용력(用力)을 이제 그 어디에서 뵈올 것인가? 수년 전 불국사 전 주지이신 종우 큰스님과 대궁당 큰스님 모시고 떡국공양을 하던 정월 초하루가 벌써 그리워져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데, 금생에 큰어른과의 잠시 스쳐지나간 인연은 이 얼마나 소중하고 지중했더냐!
2024-11-11
탄탄 스님(전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장). 예전 청주의 한 공원에서 몸소 겪은 일이다. 앞을 못 보던 어느 맹인이 타인의 수십 년 먼 훗날의 운세를 봐주고 있기에 하루 종일 그를 지켜보며 소일했던 적이 있다.점사를 묻고 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으니 그의 호구지책이 염려가 되기는 하였지만 ‘크게 구김은 없겠구나’ 하며 해가 저물어가던 공원 벤치에서 막 일어서 요기를 하려가려는 찰나였다. 그도 일과를 다 마친 듯 접어두었던 맹인용 하얀 스틱을 꺼내 들고 공원을 막 나서려고 하다가 가로수 나무에 걸려 휘청거리는 모습을 봤다. 맹인이 고객들의 수십 년 세월의 운세와 점을 잘도 쳐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몇 시간, 몇 분 후의 운명은 모르는 법이다. 살아간다는 건 예측불허 미지의 세계다.현대사회가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전하고 예측 가능한 시스템으로 천기를 읽어내고 일기를 예측하지만, 오늘 오후엔 비가 올 것이라던 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사람의 운명도 어느 날 어느 시에 운명의 장난에 의해 어찌 될지 모르는 처지여서 근친 혈육들이 재산상속 문제로 법적 송사를 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아왔다.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미리미리 살아생전 유서나 유언을 해 두는 것이 사후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한 치 앞조차도 예측불허인 삶을 예비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싶다.16세기 일본은 백년이 넘도록 센고쿠시대(전국시대)로 수많은 다이묘들의 힘의 각축장이었다. 날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참화가 그침이 없던 시절, 일본 열도의 통일을 거의 눈앞에 둔 오다 노부나가라는 무장은 18세가 되던 해 부친인 오다 노부히데로부터 가독(가장권을 행사하는 권한)을 물려받았다.가독이나 당주란 안동 명문 집안의 장자에서 장자로만 이어지는 종손처럼 가문을 번성케 하는 막중한 책무와 재산과 노비들이 주어진다.봉건영주의 시대, 많은 가신을 거느리고 전쟁에서 오직 승전을 하는 길만이 다이묘 자신 뿐 아니라 가문의 멸문지화와 가신들의 불운을 막는 최선의 상황. 그는 독점적으로 물려받은 가독의 자리를 기반 삼아 천하통일을 위한 기틀을 차근차근 마련해 나가고 있었다.오다 노부나가 또한 스물네 명의 자녀 중 장자인 오다 노부타다에게 가독을 물려주려는 의도였다. 일단의 군사를 맡겨 고도의 훈련을 시키던 시기에 그는 명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49세가 된 오다 노부나가는 어느 날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자신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측근에게 자신과 한 날 한 시에 태어나 동일한 사주팔자를 가진 사람을 데려 오도록 명령했다.교토의 혼노지(本能寺)라는 절에 머무르고 있던 그에게 불려온 대장장이에게 물었다.“그대는 나와 사주팔자가 똑같은데, 어찌 하찮은 대장장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가?“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이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음을 은근히 내세우며, 대장장이의 변변치 못한 모습을 보며 즐기듯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장장이는 고개를 바로 들고 이렇게 말했다.“현재 주군의 명성이야 세상에 자자하니 누구든지 부러워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제의 일인 것이고 내일은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지요.”이 말에 불같은 성격의 오다 노부나가가 칼을 빼들고 대장장이의 목을 치려 하자 곁에 있던 측근들이 말렸다. 주군의 명성에 흠이 된다며 참으시라 한 것이다.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다 노부나가가 머물던 임시 처소인 혼노지의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있어 잠에서 깼다. 자신의 측근 중 가장 충신으로 불리던 아케치 미츠히데가 휘하의 부하장졸 1만3천여 명의 군사를 끌고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 역사의 그 유명한 반란, 즉 혼노지의 변고(本能寺の変)가 발생한 것이었다.당시 그는 불과 100여 명의 남짓의 가신들과 그곳에 머물고 있어 제대로 응전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운명을 예감하며 혼노지에 불을 질러 생을 마감한다. 인근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훈련 중이던 장남 또한 몰려드는 반란군에 대항하다가 할복해 자살했다. 대장장이가 말한 그대로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왜 아케치 미츠히데가 주군을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오다 노부나가의 성정이 매우 거칠고 부하를 함부로 다루면서 원한을 품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나돈다. 또한 천하통일의 과실을 아케치 미츠히데가 가로채려 했을 수도 있다.그런 점에서 혼노지의 변고는 한국 현대사에서 궁정동 안가에서 벌어진 박정희의 친위대장이기도 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10.26사태 하극상과 유사하다는 사가들이 평가가 있다.오다 노부나가처럼 박정희도 가장 신뢰하던 측근에게 배신을 당했다.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음이다. 혼노지의 변이나 궁정동 만찬장에서의 시해 사건에서 보듯 역사의 흐름은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급격한 정치적 변동이 일어난다.일본 전국시대의 종결과 통일시대를 여는 변곡점이 된 혼노지의 변처럼 1979년 10월 26일도 한국 현대사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다 노부나가와 박정희의 비극적 죽음. 그 이면에는 사소한 개인적 원한이 있었다고 추정된다.천하통일을 달성한 후 장자에게 가독을 상속하려던 오다 노부나가의 꿈도 그렇게 혼노지의 변고와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졌다.권력과 부는 영원할 수 없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권력을 독점한 이도 거대한 부를 쌓아 올린 이도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처참히 몰락할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불세출의 영웅도 한순간에 비바람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교훈이 이 두 사건에 잘 나타나 있다.권력을 지키려고, 재산을 지키려고 아무리 철저히 대비한다 한들 운명을 피해 갈 수는 없으니 그것이 우리네 인생인지도 모를 일이다.“敵は 本能寺に あり!!”무장 가문들 간에 처절한 살육과 암투가 절정을 치닫던 그 센고쿠시대, 1582년 6월 2일 새벽 6시,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1528-1582)가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가 묵고 있는 혼노지를 포위하고 쳐들어가면서 부하들에게 내지른 명령은 이 한마디였다.불의에 모반을 당한 오다 노부나가는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피와 땀으로 어렵게 일구어 온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화염 속으로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져 갔다.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헤이안(平安) 시대 이후 오랜 세월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종교의 중심을 이루어 온 교토(京都)의 웅장하고 화려했다는 대찰 혼노지에서 ‘울지 않는 새는 죽여 버린다’던 오다 노부나가는 충천하는 살기와 날름거리는 불길에 휩싸여 마지막 광기를 드러내며 불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2024-08-16
탄탄스님(통도사중동분원 서래사주지, 동국대(와이즈 캠퍼스) 출강) 밤 하늘의 별들이 초롱초롱하고 칠흑같은 어둠속 저 멀리 산그늘이 더욱 검푸른 곳에서 하루에 두끼만 먹고 어떨때는 일용할 두끼마저 삼양라면과 농심라면이고 밤참으로는 가끔 왕뚜껑 컵라면 일 때도 있었지만 차리리 속은 편했던 적이 있다. 사람을 만나고 친분을 쌓아올려 수 천명의 지인이 있음 뭣 할런가? 살아보니 다 헛되고 헛된 인연이더라. 세상 살아가며 허무함을 느껴 나락에 빠진 자에게 겨울이면 아프지나 말고 엄동설한 굶지말고 잘 버티라며 쌀 한가마 김치 몇포기 나눠주는 지인 딱 한 명이면 그저 행복한 세상일터.직장생활에 밥줄을 걸고 높은 자,같잖은 자,눈치나보며 비위맞추랴,쥐꼬리같은 박봉에 온갖 스트레스를 다 받아가며 사는 꼴이 꼭 여색에 빠져서는 머리부터 아그작 아그작 암컷에게 씹혀 먹히는 줄도 모르다가 최후에는 성기조차 씹혀먹히며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숫컷 사마귀 같은 수 많은 인생도 어지간히 애잔하다. 인간세상이란게 종족번식을 위해서이든, 애욕에 빠져서이든, 짝사랑이든, 또 그 어떴든 간에 숫컷 사마귀처럼 애처롭게 살아가는 이 또한 부지기수다. 갈 곳도,오라는 곳도 없어 하루 온종일 신물이 나오도록 라면으로 연명하지만 이 몸은 자유로운 들개 버금가는 자연인이다. 잠 못이룬 긴긴밤 줄기차게 마셔된 술병이 머리맡에 나부끼고 이를 바라보며 우선 당장 해장할 고민에 머리를 감싸나,그래도 그대는 자유인이자 자연인 아닌가. 여름날 밤에도 온 몸에 모기에 뜯기며 홀딱 깨벗고 잔걸 보면 더욱 그렇다. 이 몸이 아침이면 뱃속이 벌써 여러 해째 영 불편하였다.생률과 생무우를 먹어 보면 어떨까하여 생각만 하염없었지만,밤을 날로 예쁘게 깍어 무우를 밤톨처럼 깔끔하게 까서는 앙징맞은 찬합에 넣어 대령해줄 어여쁜 어느 여인이 있나, 그 번거로운 일을 해 줄 언년이 식모가 있을까나, 마트에 가서 무우 한개 먹자고 한 다발을 사와서 보관 할 곳도 없고 당뇨에는 썩 이롭지 않지만 비타민C가 엄청 풍부하다는 사과나 감조차 혼자 먹자고 깍아 먹는 사소하기조차 한 일도 그렇게 쉽지가 않다. 이토록 혼자 사는 일은 그 모든 것이 수월치가 않다.가끔 자연인 재방을 본다.홀로 날마다 부지런 떨며 깊은 산 속에서 집도 손수 지어 자급자족을하며 사는 모습, 대단한 용기이지 않은가.어디에도 얽메임 없는 자유를 갈망하여 온갖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생활하는 그 신념과 용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높이 평가할 만 일이다. '만사 귀차니즘' 에 빠진 현대인들에게는 죽었다가 여러 번 깨어나도' 언감생심으로 꿈꿀수도 없는 그 신비의 세계, 그 삶도 충분히 인간다운 삶이라는 철리를 깨우쳐 본다. 누군가에게 얻어들은 옛날옛적 이야기 하나 해보자,"어느 골짜기에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칡넝쿨을 거두려고 웬 줄을 당겨 붙들었는데, 그것이 하필 그늘에서 자고 있던 호랑이 꼬리였다.이런 낭패가 있나,잠자는 호랑이를 건드린 나무꾼이 깜짝놀라 급히 나무 위로 올라갔다.잔뜩 화가 난 호랑이가 나무를 마구 흔들어 대자 놀란 나무꾼이 엉겹결에 그만 손을 놓아 버렸다. 그런데 나무에서 떨어진 곳이 하필 호랑이의 등이었다이번에는 호랑이가 너무도 놀라 몸을 흔들어 대었고,나무꾼은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호랑이는 나무꾼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달리기 시작했다.나무꾼은 살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호랑이 등을 더 꽉 껴안고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그런데,한 농부가 무더운 여름에 밭에서 일을하다가 이 호사스런 광경을 보고는 불평을한다. “나는 평생 땀 흘려 일만 하고 사는데,어떤놈은 팔자가 좋아서 빈둥빈둥 놀면서,호랑이 등만 타고 다니는가?”농부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호랑이 등을 붙들고 있는 절대절명의 생사의 기로에 있는 나무꾼을 부러워 했다나ᆢ. 때로는 남들을 보면 다 행복해 보이고 나만 죽도록 고생하는 것 같다. 나는 뜨거운 뙤약볕에서 일을 하는데 남들은 호랑이 등을 타고 신선 놀음을 하는 듯 하다.그러나,실상을 알고보면 사람 사는 것이 거진 다 거기서 거기 비슷하다.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나와 똑같은 외로움속에서 몸부림치며 생을 영위하고 남과 비교를하면 다들 내것이 작아 보인다.나에게만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을 들어가 보면 누구에게나 아픔이 있다.비교해서 불행해 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는것이 현명한 삶의지혜가 아닐까 한다. 탈탈털린 영혼이었을때 꼭 한번은 만나보시라고 꼭 강권하고 싶은 경북 영덕군 남정면 골짜기의, 포항에서 제일 높은 스님은 아니지만 젤 높은 곳 내연산 문수암에 가면 저절로 만나지는 스님이 있다.산위에서 산밑을 바라보라.모두 다 아랫것들로 보이더라, 높은곳은 뭐 별천지 더냐?,지역사회에서 명망있는 팔순의 카톨릭 사제를 거주하는 암자의 명예신도회장으로 일방적(?)으로 임명하시고 하루 흙짐 스무지게를 지어 절을 손수 보수 수리하고 일상에서 지옥과 극락교를 마음대로 건넌다는 지론으로 아무런 걸림없이 겸손을 지향하며 내 맘이 가는대로 당나귀하고 염소하고도 벗이 되어주고 가파른 산길에서 지던 짐을 내던지는 당나귀 타박하지 않고 돌려받아 둘러메고는 묵묵히 산길 걷는 포항의 기인스님, 3,000배도 쉽지 않은데 팔굽혀 펴기 3,000회도 끄떡없다더니 몸을 너무도 흑사하며 하나 뿐인 몸을 아끼지도 않더라.남의 사주팔자도 명쾌히 들여다 보고 염생이 밥주려고 청과시장 썩은 과일 수거하러 트럭을 몰고 극락교를 건너 사바로 발길 향하는 작업복도 잘 어울리는 묵설스님이다. 포항에 잠시 살때면 가끔은 통화도 하고는 했지만 더운 날엔 내가잡은 고기는 말고 방금 죽어버린 시원한 물회 한사발을 정성껏 공양을 올리고 싶다.'전국의 기인찾아 삼만리'를 취미삼은 내게 경북 영덕군 남정면 회리길499로 좀 오라하시기에 한숨에 달려갔네. 비싼 게 좀 먹자면서 곱게 동여멘 포장끈 녹슨칼로 뚝 끊어서 융슝한 대접도 받았다.그 다음엔 이런 당부의 말씀을 주시었네, '인생이란 강한자와 대적만 하려 말고강한자를 벗으로 두는 속편한 길 가라'다 이루워져서 만족한 다음엔 그 다음에는 반드시 어김없는 허무가 찾아오기 마련인데, 그리하여 성공한 사람들이나 어느정도 성공하여 일가를 이루웠거나 돈줄을 거머 쥔 재벌이거나 유명연예인들이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 후에 그 공허를 이기지 못해서 도박도 하고 술이나 이성을 찾고 더 나락으로 빠져서 마약으로 그 공허함을 넘을려고 하는 것 같다며, 자신도 수행길 고단하고 외로워서 술마시다가, 아까비라 내청춘도 많이 지난간 거라고 솔직담백하게 할도 해주고 방도 해준다.그러면서 나에겐 한가지 더 한번 더 강조하여 챙겨주는 말쌈이"절대로 강한자에게 덤비지 말고친하게 지내요'두 번을 더 내게 반복 강조를 하더니만, 또 '어떤 일을 하든 아쉬움을 조금 남겨두는 것이 현명하다'고 하신다.인간에게는 이성적으로 다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어야 하며, 그래야 호기심을 일으키고 희망을 되살린다고 되뇌이셨다.동물선원 원장직 마다하지 않고 제 갈길 가는 기인(?)이랄까, 수행도 독특한데 니들 맘대로 생각하던 말던멋대로 살아갈테니,괘념치를 않는다네.헤어짐을 앞두고선 사족을 하신 말쌈이 '완벽한 만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론 노력도 해야 하지만 조금은 부족한듯 여지를 남기고 감사 할줄도 아는 겸손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또 현실에 순응하고 마음의 부족을 채우라고 덧붙이셨다.날 콕찍어서는, 언어를 빨리하면 복이 감한다고 다른 복은 갖추었어도 말을 천천히 하라고 말이 많은 사람들은, 즉 욕구불만이니 말을 줄이는것이 상책이라신다.촌로처럼 허름하게 늙어가지만 어느 관상가 점쟁이 뺨따구 왕복으로 서너번도 더 쳐주는 도인도 훨씬 능가하는 꿰뚫어 명쾌하기조차 한 인생길 조언도 결코 마다하지 않으면서, 예전의 묵설당이 그 포커페이스 고수의 묵설은 온데간데 없고 번듯한 중늙은이의 스님으로 거듭나 내일모레 구순의 신부님하고도 승속과 종교도 초월하고 지옥과 극락도 마음대로 넘나드는 확고부동한 고독한 수행자의 늠름한 모습이었다네. / 탄탄(통도사 포교원 서래사 주지•동국대학교 출강)
2024-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