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건축된 옛 성베드로 대성당의 내부 구조를 재구성한 도판.

서양미술사는 서유럽지역에서 나타난 미술을 주로 다룬다. 시기적으로는 4세기 초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서양미술사가 시작된다. 유럽문화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와 로마시대 미술은 여러 시대에 걸쳐 서양미술의 모범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인용되기는 하지만 서양미술사의 직접적인 연구영역은 아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내린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도들의 종교 활동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밀라노칙령 이전 기독교도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해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기독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무덤이나 가정에 숨어서 몰래 예배를 드렸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인정하게 된 것과 관련해 설화처럼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후기 로마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네 명의 황제가 구역을 나누어 다스리는 사두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사두정치는 오래 존속하지 못했다. 황제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 로마 근교 밀비우스 다리에서 결전을 벌였다. 전투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는 신비한 체험을 한다. 막사에서 잠을 청하던 콘스탄티누스에게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 표식 아래 승리를 얻을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어찌할 바를 몰랐던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 모양을 깃발과 방패에 새긴 후 전투에 나섰다. 그리고 승리를 거두 얻다. 십자가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믿은 콘스탄티누스는 이듬해인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기독교를 인정했고 이로써 서양미술사의 첫 단추가 끼워졌다.

종교 활동이 허용된 기독교도들이 마주한 첫 번째 문제는 예배드릴 적절한 공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신전을 개조해 교회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교도들이 우상을 모신 곳이라는 종교적 거부감 외에도 신전의 내부 공간이 협소했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군중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던 기독교도들의 눈에 들어 온 것이 바실리카였다. 공공건물이었던 바실리카는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건축구조를 가졌다. 장방형(長方形)의 바실리카는 넓은 공간을 갖추고 있어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 팔던 실내시장의 기능을 했으며 재판이 진행되기도 했다. 다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군집할 수 있을 정도로 실내 공간은 충분히 넓었다. 출입구 반대편 끝 쪽에 재판장의 자리가 무대처럼 조성되어 있었던 것도 교회로 쓰기에 유리한 구조였다. 건축적으로 시선이 집중되는 그곳에 기독교도들은 예배의 중심인 제단을 모셨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 교회를 짓도록 명령했다. 그렇게 건축된 것이 라테라노의 산 조반니,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이들은 모두 바실리카 형식으로 지어졌다. 콘스탄티누스 때 건축된 이 교회들 중에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재건축된 것이고 옛 모습은 추측해 재구성한 도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장방형의 평면도를 보이는 옛 성베드로 대성당 내부는 모두 다섯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중앙에는 넓고 높은 공간 신랑(身郞)이 위치해 있고 좌우에 각각 두 개씩 낮고 좁은 통로 측랑(側廊)이 마련되어 있다. 신랑과 측랑 사이에는 줄지어 서 있는 기둥들이 공간의 경계를 이루고 천장은 열려 있어 대들보와 지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바실리카에서 교회건축의 모범을 발견한 기독교도들은 또 다른 중요한 문제에 부딪혔다. 교회를 어떻게 장식해야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기독교가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는 우상숭배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의 성화상 사용에 대한 입장차는 이후에 벌어질 동서 교회의 분열은 물론이고 미술사 전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술사학자 김석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