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풍경 속엔 차가운 아름다움과 뜨거운 열망이 동시에 담겼다. 그런 차원에서 김선향의 시는 설경과 닮았다/경북매일DB.
눈 내린 풍경 속엔 차가운 아름다움과 뜨거운 열망이 동시에 담겼다. 그런 차원에서 김선향의 시는 설경과 닮았다/경북매일DB.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렇다면 외출을 자제하는 사람들은 뭘 하며 지낼까? TV 보는 시간이 대폭 늘어났다는 언론 보도를 가끔 접한다. 나쁘지 않다. 인간에겐 감각적 즐거움의 충족도 필요하니까.

하지만 ‘이성적 채움’을 원하는 이들에겐 TV 앞에서만 머무는 게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닐 듯. 이럴 때 독서만한 게 있을까? 시집을 읽는다는 건 비어가는 영혼의 곳간을 채우는 행위가 분명하다.

최근 시인 김선향(54)이 2번째 시집을 펴냈다. 한국 나이로 마흔 살에 늦깎이 등단했고, 첫 시집을 상재한 지 4년. 누군가는 “너무 성급하게 새 시집을 출간한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천만에. 김선향의 제2시집 ‘F등급 영화’는 이런 우려를 불식한다. 아래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마흔 살 늦깎이 등단… 열정적 시인의 삶 고스란히
4년 만에 두번째 시집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 ‘눈길’

 

김선향의 첫 시집 ‘여자의 정면’.
김선향의 첫 시집 ‘여자의 정면’.

▲빛나는 것들이 아닌 상처받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애정

자신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는 ‘슬픈 사람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관심이 행간마다 묻어나는 김선향의 시들은 훌쩍 다가선 한겨울 설경처럼 차갑게 맑고, 어머니의 포옹처럼 따스하다. 먼저 ‘F등급 영화’에 수록된 절창 중 하나인 ‘첫눈’을 읽어보자.

전당포 외벽 철제계단 위로 미끄러지며
커피 배달을 가는 여자 가죽스커트 터진 치맛단 속을 돌아
백반집 앞 양파 다듬는 노부부 검버섯을 지우며
종합병원을 막 빠져나온 영혼에도 잠시 머물다
저녁내 부엌 쪽창에서 어른거리다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첫눈이 실상은 ‘전당포 외벽’이나 다방 종업원의 ‘터진 치맛단’, 늙은 부부의 ‘검버섯’처럼 남루한 풍경 위로도 내린다는 문학적 발견. 예사롭지 않다. 통념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이를 알아챈 동료 시인 문태준은 아래와 같은 말로 김선향의 최근 시를 해석하고 있다.

“이 세계의 약자를 관심에서 배제하지 않고 숭고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받들어 모신다. 이주민, 난민, 철거민 그리고 감정노동자에 대해 공동체가 온당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처우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 김선향에겐 세상 빛나고 잘난 것들보다 상처받고 아픈 것들이 관심사다.

그러한 태도는 인간에게나 사물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문장을 쓸 수 없다. 같은 시집에 수록된 ‘공평무사’라는 노래다. 아래 인용한다.

초원의 여자는/허벅지를 벌리고 앉아/두 팔로 감싼다/오른쪽은/아기한테/왼쪽은/야윈 새끼양한테/젖을 물린다/새하얀 새끼양의 이빨에 물린/왼쪽 젖꼭지엔/언제나 붉은 핏방울/왼쪽 젖가슴은 오른쪽보다/훨씬 크게 불어났다/짝짝이 젖가슴도 생채기도/아랑곳없다/초원의 여자는/어미 잃은 새끼양의 어머니/사내아기의 어머니

아마도 시의 배경은 몽골 초원의 게르(Ger) 앞이 아닐까. 아니, 가축을 키우는 한국 시골마을 마당의 풍경이라 해도 좋겠다.

제 아이와 말 못하는 짐승을 동시에 품어 안고 젖을 먹이는 여자의 모습은 재론의 여지없이 숭고해 보인다.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으로 이야기되는 모성(母性)의 한 정점을 그려낸 작품. 적지 않은 남성 독자들을 찡하게 만들 법하다.
 

시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김선향의 제2시집 ‘F등급 영화’.
시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김선향의 제2시집 ‘F등급 영화’.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의제로서의 새로운 페미니즘

‘F등급 영화’엔 함께 모여 낭송하고픈 빼어난 시가 여럿 담겼다. ‘후남 언니’ ‘구체관절인형’ ‘반도체 소녀’ ‘겨울 아침’ ‘공정거래’ ‘자전거를 타는 여자’ 등등. 하지만 지금은 그러기 힘든 시절. 앞서 말했듯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시기니까.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시집을 깊은 감각과 넓은 시각으로 읽어낸 문학평론가 최진석의 이야기를 다소 길지만 옮긴다. 일종의 ‘2020년 오늘의 김선향론(論)’이다.

“김선향이 직조하는 시적 풍경의 탁월함은 여성성의 풍요로운 모태 위에서 이 세계의 온갖 사건들을 세심하게 짚어내는 데 있다. 무엇보다도 이주민 여성들의 슬픈 내면을 포착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수난의 시간을 정직하게 직시하며, 남성 지배 사회에서 독립자존하기 위해 쟁투하는 여성들의 삶을 흔들림 없이 묘사하려는 의지는 그녀의 여성성이 모호한 전통적 관념과는 달리 우리 시대의 의제로서 페미니즘이라는 입지점에 서 있음을 시사한다.”

소녀 시절을 거쳐 국문학도 때부터 꿈꾸었던 ‘시인의 삶’에 마흔 살까지 가닿지 못한 건 김선향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자신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의 뜻, 혹은 여성에게 책 읽고 글 쓸 시간을 주지 않는 한국사회의 매정함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마음껏 시를 쓸 수 있게 된 지금의 시간이 김 시인에겐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다.

출발이 늦었으니 남들보다 몇 배 더 시와 시인의 삶에 열정을 쏟고 있다는 게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이번 시집 ‘F등급 영화’는 그 증거물이라 해도 무방하다.
 

김선향 시인.
김선향 시인.

▲‘오늘의 김선향’과 ‘어제의 김선향’을 두루 살펴보려면

사람의 현재는 과거의 총합이자 총체다. 미래는 현재와 과거를 통해 예측이 가능하다. 지난 2016년 김선향의 첫 시집 ‘여자의 정면’이 출간됐을 때 기자는 이런 독후감을 썼다.

“시인은 ‘여자의 정면’이라고 차갑고 딱딱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김선향의 첫 시집에선 정면은 물론 측면과 뒷면, 여기에 때론 추악한 ‘인간의 배후’마저 따스하게 포옹하는 선한 마음이 어렵지 않게 읽힌다. 바로 이 대목이 김선향을 ‘날것의 언어’로 ‘기성 질서에 대한 시적 거부권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여성 시인의 하나로 인정하게 한다.”

책장에 꽂힌 ‘여자의 정면’을 다시 펴든다. 자신이 처음으로 낸 시집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었을 김선향의 얼굴이 새삼 그려진다. 동시에 이런 시를 발견한다. ‘도둑고양이’다. 아니, 도둑고양이처럼 춥고 가련한 여자의 이야기다.

쥐도 새도 모르게
아기를 지우고

산부인과 지하식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설렁탕을 퍼먹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차가운 금속기구로 뱃속 아기를 긁어낸 후 소의 살과 뼈로 끓인 국물을 마신다는 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란 끔찍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스스로는 평상심과 냉철함을 잃지 않는 담담한 태도.

세상을 직시하는 시적 촉수가 예민하지 않다면 만들어낼 수 없는 문장이다. 짧지만, 그래서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시.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으니 겨우 4년 만에 자신이 차지한 시의 영역을 괄목할 정도로 넓힐 수 있었을 터. 12월 말. 앞으로 추위는 더 매서워질 테고 북쪽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은 기세를 드높이며 목덜미를 때릴 게 분명하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위로’가 아닐지.

시를 포함한 문학이 선물하는 위로는 다른 어떤 것이 줄 수 있는 위로보다 따스하다. 우리는 그걸 이미 알고 있다. 김선향의 ‘F등급 영화’와 ‘여자의 정면’은 코로나19가 마구잡이로 횡행하는 2020년 겨울의 참담함을 견디게 해줄 좋은 친구다. 곁에 두길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