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창파 너른 물에 배 띄워놓고…
만경창파 너른 물에 배 띄워놓고…
  • 등록일 2020.10.28 18:45
  • 게재일 2020.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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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손경찬의 대구·경북 人
영남민요·아리랑 전수자 배경숙 씨

아리랑이 무엇일까?

아리랑은 우리 민족에게 민중의 비애와 한을 담은 삶과 죽음의 대서사시이다. 권력에 대한 개인적 집단적 저항의지의 발현체이기도 하다. 아리랑은 삶의 마디마다 우리네 서러운 민중을 달래며 가슴 흥건히 고인 한의 정서를 삭이고 풀어준 소리였다. 그 아리랑이 2012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고, 2015년 국가무형문화재 제 125호로 지정되었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곡으로 강원도아리랑, 경기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외에 무려 3600여 곡의 아리랑이 선조들의 사랑과 이별, 삶의 애환을 노래하며 전달되고 있다.

영남민요연구회 영남아리랑 연구회 회장이기도 한 배경숙 선생님을 만났다. 양손에 들고 온 꾸러미가 무거워 보였다. 보자기를 풀자 민요와 아리랑에 관한 책과 공연 프로그램을 비롯한 자료가 한 보따리였다. 꼼꼼하게 자료까지 챙겨온 성의가 놀라웠다. 연구 자료를 듬뿍 안고 온 그녀가 아리랑전승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학자인가 하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전주대사습에 빠진 남편과 함께
같은 취미 가지려 민요의 길에 들어서
국문학자이자 민요연구가였던
이재욱 선생의 영호남 민요 채집 자료
20년간 찾아다니며 '영남민요연구'로 남겨
직접 가사 쓴 창작아리랑 등과 한데 묶어
'영남의 소리' 앨범 시리즈 만들기도

예전에는 민요 속에 아리랑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아리랑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며 민요에서 분리되어 아리랑만의 독립 체제로 우뚝 서게 되었다고 설명해주었다. 아리랑은 전설이나 설화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특성을 띠고 있어서 기록이 남아 있기 어려운데, 영남전래민요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줌치타령’을 비롯한 370여 곡의 영남민요아리랑이 전해지게 되었다. 배경숙 선생님이 보자기로 곱게 싸둔 책자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것이 바로 이재욱 선생님이 쓰신 ‘영남전래민요’의 필사본이었다.

경성제국대학 시절에 이재욱 선생님은 영호남 지역을 직접 다니며 민요를 채집했다. 자칫 사라질 뻔한 그 민요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된 것도 이재욱 선생님의 필사본을 통해서였다. 배경숙 선생님은 ‘영남민요연구’라는 이름으로 석박사 논문을 쓰면서 이재욱 연구에 매달렸다. 국문학자였고 민요연구가였던 그분의 자료를 찾아서 도서관을 뒤지고 다녔다. 그분이 납북되면서 이름이 지워지고 자료가 흩어진 것이 안타까워 그것을 한곳으로 모으는 작업에 매달린 것이 20년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요연구 학자였던 그분은 고월 이장희 시인의 조카였다. 1931년 조선어문학회 발기인으로 참가해서 해방 후 국립도서관장으로 위촉받아 ‘초대 관장’으로 취임했다. 우현서루의 초대 국립도서관장을 지내기도 했던 이재욱 선생님은 ‘영남민요’를 주제로 학위까지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요전공자이시다. 그런데도 정작 자료 조사를 시작해보니 그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라고 이야기하는 배경숙 씨.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라고 이야기하는 배경숙 씨.

그 안타까움이 배경숙 선생님으로 하여금 그분을 연구하게 만들었다.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채집하고 연구한 자료가 ‘영남전래민요집’으로 묶여 나올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분은 배경숙 선생님이 영남민요연구에 매달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영남아리랑기행’이라는 주제로 대구일보에 칼럼을 쓰며 필사본에 실려 있는 가사에 곡을 붙여 작창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서예로 담은 아리랑 일만 수’를 통해 배경숙 창작의 아리랑을 여러 편 소개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배경숙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라는 제목의 앨범 시리즈를 주셨다.

“제가 가사를 쓴 곡으로 팔공산 아리랑과 구미아리랑, 경산아리랑, 의병아리랑, 봉화 아리랑, 청송 아리랑, 압량아리랑과 같은 창작아리랑과 이재욱 채록 전래민요를 포함한 재발견 영남민요 23수가 들어 있어요.”

앨범 표지에 흰색 한복을 차려 입은 단아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연주회 때 어떤 식으로 곡을 전달하는지 들려달라고 했다.

“스무 명 정도가 돌아가며 창과 군무로 이야기가 있는 무대를 꾸며요. 예전 어머니들이 해오던 것처럼 실제로 디딜방아를 구해서 방아를 찧기도 하고, 직접 물레를 돌리거나, 모심기를 하고 빨래 다다미질을 하며, 스토리텔링을 만들어서 창을 불러요.”

화전놀이를 할 때는 직접 진달래꽃을 따와서 무대에서 화전을 구우며 공연을 한다는 얘기가 너무도 생동감 있게 들렸다. 창과 군무를 곁들여 스토리텔링으로 전달하니 이야기가 풍성하게 살아날 것 같았다. 아리랑이라는 곡에 맞춰 무대에 맞게 스토리를 구성하고, 인물과 사건을 만들고, 스토리에 삶을 담아내는 과정이 소설 쓰기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녀의 이러한 아리랑 작창과 전형화 활동은 아리랑의 가치와 특성을 드높이기에 이른다.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라고. 신명의 소리인가 하면 한풀이이고, 옛것이면서 오늘의 소리라고 하신다.

“가장 좋아하는 아리랑이 어떤 곡이에요?”

“헐버트 박사의 ‘구 아리랑’을 좋아합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았다는 호머 헐버트 박사. 그는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며 순 한글로 세계정보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여러 지역의 정보를 담은 ‘사면필지’를 쓰기도 했다. 그는 선교사로서 한성중학교와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경기민요 ‘군밤타령’에 음계를 붙이는 등, 그는 입으로만 전해온 아리랑을 악보에 기록했다. 그가 말한다.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들이고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 쌀과 같은 주식이라고. 문경세재에 그의 아리랑비가 서 있다. 예전에는 아리랑을 아라령 아라리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렀지만 ‘구 아리랑’ 이후 아리랑으로 전형화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아리랑에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사랑하는 님을 떠난다거나,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거나, 아랑낭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한 노래에서 나왔다거나, 구음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노동요의 성격을 띠며 두레노래로 불렸으며 구술과 암기에 의한 전승 또는 자연적 습득이라는 민속성을 띠기도 한다.

“아리랑 연구로 20년을 보내셨으니 감회가 남다르겠어요.”

배경숙 선생님이 민요를 시작한 것은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갖자는 취지에서였다. 전주대사습에 빠져있던 남편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어 국악학원에 등록했고, 정은하 선생님과 이춘희 선생님, 서정화 선생님의 사사를 받았다. ‘영남민요의 재발견’과 <201B>영남의 소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배경숙의 영남아리랑’을 대구일보에 연재하며 영남민요를 널리 알리게 되었다. 모든 역사는 이렇게 숨은 조력자의 땀과 고통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의 노력이 있어서 역사에 선조들의 삶의 기록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아리랑의 유래가 어디서 시작이 되었건, 개인적으로 나는 떠돌아다니는 소리꾼들이 힘든 고개를 넘을 때마다 흥얼거렸던 구전이 널리 전해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에 가장 마음이 간다.
민족의 얼이 서려 있는 이 노래는 고단한 삶을 살아온 우리 민족의 가슴에 맺힌 한과 설움을 토하며 불렀던 노래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음악,그게 바로 아리랑이다.”

한민족 모두에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래를 손꼽으라면 백 명 중의 아흔아홉 명이 ‘아리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국제경기 남북단일팀 공식 노래도 아리랑이고, 고종이 궁중에서 아리랑을 즐겼다는 얘기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기록되어 전해지는가 하면, 밀양 ‘아랑의 전설’에서 전해진다는 설도 있고, 어느 수필가의 설명에 의하면 아리랑의 ‘랑’이 고개 령(嶺)의 변음이어서 아리랑은 긴 고개를 뜻한다는 설명도 있고, 고려 말 백두대간과 동해안 일대 음악권 메나리조를 중심으로 전파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그 유래가 어디서 시작이 되었건, 개인적으로 나는 떠돌아다니는 소리꾼들이 힘든 고개를 넘을 때마다 흥얼거렸던 구전이 널리 전해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에 가장 마음이 간다. 민족의 얼이 서려 있는 이 노래는 고단한 삶을 살아온 우리 민족의 가슴에 맺힌 한과 설움을 토하며 불렀던 노래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그렇기에 먼 타국에 사는 우리 민족들은 좋은 일 힘든 일에 맞닥뜨릴 때마다 함께 입을 모아 아리랑을 부르곤 했다.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음악, 그게 바로 아리랑이다.

‘아리랑’이라고 하면 나운규 감독의 무성영화 ‘아리랑’이 생각난다. 주인공 영진은 3·1운동 때 잡혀서 일제의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된 민족청년이다 작품의 주제를 민족항일투쟁에 맞추고 전통 민요인 '아리랑’과 연결해서 승화시킨 영화였다. 우리 농촌의 생생한 현장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묘사했다는 평가와 함께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좋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평소에 생활철학이 뭔가요?”

“감동을 주며 살자고 늘 얘기해요.”

그 자신만만한 의지가 선생님을 무대에 서게 하고, 민요집 발간에 뛰어들게 하고, 책을 쓰게 만든다. 단순히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지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민요가 ‘아리랑’ 연구에 일생을 보내게 될 줄 몰랐다며 웃는다.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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