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을 비추면 삶의 길이 보인다
묘비명을 비추면 삶의 길이 보인다
  • 등록일 2020.10.19 19:56
  • 게재일 20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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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하<br>전 포항시의회 의장
박문하
전 포항시의회 의장

몇년전 해외연수 차 공무로 미국을 경유한 남미 3개주(브라질, 페루, 아르헨티나)를 다녀온 바 있다. 이국적인 분위기와 함께 무엇보다 이전의 여행에서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주 특별한 곳을 볼 수 있었는데 바로 레콜레타 공동묘지였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 자리한 이곳에는 아르헨티나 역대 대통령과 우리에게 에비타로 잘 알려진 에바 페론의 묘가 있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묘지로 유명한 곳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이 대도시 한가운데 잠들어 있는 곳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산책길이 되고 관광명소가 되어 있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생소할 만큼 문화적인 차이가 컸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문명비평가였던 임어당 선생의 ‘무덤을 거닐며’라는 시가 있다. “무덤 사이를 거닐면서 하나씩 묘비명을 읽어본다. 한두 구절이지만 주의 깊게 읽으면 많은 얘기가 숨어 있다. 그들이 염려한 것이나 투쟁한 것이나 성취한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태어난 날과 죽은 날짜로 줄어들어 있다. 살아있을 때는 지위나 재물이 그들을 갈라놓았어도 죽고 나니 이곳에 나란히 누웠구나. 죽은 자들이 나의 참된 스승이다. 그들은 영원한 침묵으로 나를 가르친다. ….”

생전에 탁월한 용맹성과 출중한 인품으로 영국에서 중세기사의 표상으로 존경 받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묘비에는 “지나가는 이여 나를 기억하라. 지금 그대가 살아있듯이 한때는 나 또한 살아 있었노라. 내가 지금 잠들어 있듯이 그대 또한 반드시 잠들리라”라고 적혀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말을 너무나도 지당해서 대충 흘려 듣기 일쑤다. 지금 이 시간도 나는 늙어가고 있고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 남들과 다투거나 거짓과 미움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양심으로, 정직한 충성으로 불의와 타협을 거부한 삶이었지만 헨리8세가 반역의 누명을 씌워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고 400년 후 복권된 토마스 모어의 묘비에는 성자의 칭호와 함께 ‘고결한 양심, 불멸의 영혼 여기 잠들다’로 새겨져 있다.

한평생 사랑으로 세계의 교육계에 혁신적 영향을 끼친 페스탈로치 묘비명은 ‘가난한 자의 구조자, 고아의 아버지, 새로운 학교의 창시자, 참된 인간, 선량한 시민 모든 것을 남을 위해 바치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그의 이름에 은혜가 있기를….’로 되어 있다.

숭고한 삶을 마감하고 잠들어 있는 위인들의 묘비명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날마다 죽음과 만나는 어느 묘지 가이드가 남긴 말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인생의 길이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지만 인생의 두께나 농도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묘지를 거닐면 현재를 사랑하게 된다.’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그리고 묘비명을 비추면 남은 삶의 길이 보인다.

비록 오늘은 삶의 한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이 어느 날 문득 죽음의 광주리를 내밀었을 때 나는 과연 그 광주리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고민하면서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오늘도 허무, 실패, 좌절 같은 단어들이 짓눌러 오는 삶의 무게 때문에 방황하고 있다면 먼저 간 위대한 선현들의 묘비명을 한번쯤 읽어보면 어떨까 권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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