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태 수

달빛이 침묵의 비단결 같다

우둑커니 서 있는 벽오동나무 한 그루

그 비단결에 감싸인 채

제 발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깊은 침묵에 빠져들어

마지막으로 지는 잎사귀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벗을 것 다 벗을 저 늙은 벽오동나무는

마치 먼 세상의 성자, 오로지

침묵으로 환해지는 성자 같다

말 없는 말들을 채우고 다지고 지우는 저 나무

밤 이슥토록 달빛 비단옷 입고

이쪽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다

오랜 세월 봉황 품어 보려는 꿈을 꿨는지,

그 이루지 못한 꿈속에 들어 버렸는지

제 몸을 다 내려놓으려는 자세로 서 있다

달빛 비단 자락 가득히

비단결 같은 가야금 소리, 거문고 소리

침묵 너머 깊숙이 머금고 있다

가을 밤 푸른 성장(盛裝)을 벗어버린 벽오동나무를 바라보며 성자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한 때는 봉황을 기다린 욕망의 시간도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소유와 욕망의 부질없는 것들을 다 벗어버린 홀가분한 상태의 나무에서 시인은 성자의 모습을 본 것이다. 어쩌면 인생의 후반부를 걸어가는 시인에게도 그런 비움과 내려놓음의 겸허한 정신을 본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을 엿볼 수 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