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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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20.08.04 20:01
  • 게재일 20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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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br>동덕여대 교수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

“더 쏟아져라! 어서 한 번 더 쏟아져서 바웃새에 숨은 뿔갱이마자 다 씰어가그라! 나무틈새기에 엎딘 뿔갱이 숯뎅이같이 싹싹 끄실러라! 한 번 더, 한 번 더, 옳지! 하늘님 고오맙습니다!”


윤흥길의 소설 ‘장마’에서 국군 소위로 전쟁터에 나간 아들의 전사 통지를 받은 후 장마철 벼락이 치며 장대비가 퍼붓는 날씨에 외할머니의 저주에 찬 외침이다. 빨갱이가 되어 산으로 들어간 아들을 기다리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갈등은 퍼붓는 빗줄기보다 더 세차고, 몸을 휘감는 장마철 눅눅한 습기보다도 더 서로를 불쾌하게 만든다. 그러나 집으로 들어와 감나무 위에 올라앉은 구렁이 한 마리를 아들로 생각하는 친할머니를 대신하여 외할머니가 음식 소반을 차려내고 친할머니의 머리카락을 태워 주자 감나무 가지를 친친 감았던 구렁이는 천천히 대밭으로 사라진다. 결국 두 할머니는 화해하고 친할머니의 임종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판교의 아파트 단지에 사람 키보다 길고 큰 뱀이 나타났다고 아내의 지인이 난데없는 뱀 사진을 보내왔다. 아니나 다를까 산골이 아닌 도시 곳곳에서 뱀 출몰이 부쩍 늘어났다는 뉴스 기사가 이어졌다. 장마가 길어지고 비도 많이 내리면서 뱀들이 사람의 생활 영역까지 넘나들고 있다. 오랜 비에 땅 밑에서 기어 나오는 작고 가느다란 지렁이조차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뱀이야말로 혐오를 넘어선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3년에도 6월(음력) 내내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임금이 장차 친히 광효전에 제사를 올리려 하였다가, 비가 몹시 내리므로 중지하였다.”라는 6월 1일자 기사를 시작으로 “큰비가 물을 퍼붓듯이 내려…. 풍양궁을 시위(侍衛)하는 군영(軍營)이 거의 물에 떠내려가게 되었다.”(7일), “큰 비가 와서 서울에 냇물이 넘쳐, 하류가 막혀서 인가 75호가 떠내려가고, 통곡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12일), “수재(水災)로 인하여 각 전(殿)의 차비(差備)와 선반(宣飯)을 감하여 줄이도록 하였다.”(25일)라는 기록이 이어지고 있다. 비 그치기를 기원하는 제사 기록도 여러 차례(16일, 24일, 28일) 보인다. 세종임금이 수재 대책을 명하고 급기야는 큰 비로 정사를 임시로 중단하고 수재를 걱정하였다는 내용(23일)까지 실록은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올 장마는 8월 중순까지 이어져 역대 가장 길었던 2013년의 49일을 넘어서 최소 51일을 기록하고, 역대 가장 늦은 1987년의 8월 10일보다 더 늦게 끝날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가 나왔다. 장마가 지속됨에 따라 뱀 출몰에 따르는 사람들의 놀람은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전국 각지에서 산사태와 농경지 침수 등으로 인한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가 염려되는 상황이다. 뻔한 말이지만, 정부도 민간도 이번 장마를 잘 대처하고 이겨나가야 할 것이다.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장마’의 마지막 문장처럼, 장마가 그친 후 두 할머니 사이에는 구름이 걷히고 해가 떴으리라. 이번 장마 역시 아무리 길어도 결국에는 과거형이 될 것이다. 무지개 뜬 화창한 하늘, 쾌청한 마음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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