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조선조 당대 명가의 후예로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적인 학문을 했던 인물인 허균의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가까운 집안 서숙(庶叔)이 면앙정 송순에게 말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재상 중 죽어서 서소문으로 나가는 사람은 봤지만, 살아 남대문으로 나가는 사람은 여태 못 보았네.’ 권력에 한번 발을 들이면 죽을 때까지 놓지 않으려 하기에 한 말이었다. 후에 송순이 개성유수를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서숙이 강가로 배웅을 나오자 송순이 말했다. ‘이제 제 발로 남대문을 나갑니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문을 나서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권력이란 원래 허망하기에 정의롭지 못한 인물은 더 큰 변을 당하기 전에 스스로 직을 내려놓는 게 순리라는 뜻일 것이다. 정승 조현명의 부인이 세상을 떴다. 영문(營門)과 외방에서 부의가 답지했다. 장례가 끝난 후 집사가 물었다. ‘부의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돈으로 바꿔 땅을 사 두시지요.’ 조현명이 ‘큰 아이는 뭐라든가?’ ‘맏 상주께서도 그게 좋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조현명이 여러 아들을 불러 꿇어 앉혔다. ‘못난 놈들! 부의로 들어온 재물로 토지를 사려하다니, 부모의 상을 이익으로 아는 게로구나…’ 하며 매를 몹시 때리고 통곡했다. 이튿날 부의로 들어온 재물은 궁한 일가와 가난한 벗들에게 고르게 돌아갔다. 우리사회에서 고위공직이라는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 받은 축의금이나 부의금, 부동산투기로 재산형성을 목적으로 삼는 부류들이 새겨야할 대목이다.

정조 때의 성대중은 그의 저서 ‘청성잡기, 질언(靑城雜記, 質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구차하게 먹는 것만 찾는 자는 짐승과 다를 게 없다. 눈을 부릅뜨고 이익만 쫓는 자는 도적과 한가지다. 악착같이 사사로움에 힘쓰는 자는 거간꾼과 다를 바 없다. 재잘거리며 권세에만 빌붙는 자는 종이나 첩과 같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권세욕과 물욕만 좇는 전형적인 부나비 유형들을 일컫는다. 조선후기 학자 홍석주가 쓴 학강산필(鶴岡散筆)에 이조판서 이문원의 세 아들이 가평에서 말을 타고 아버지를 뵈러 상경했다. 아들들이 말을 타고 온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며, ‘아직 젊은데 고작 100 여리 걷는 것이 싫어 말을 타다니, 힘쓰는 것을 이렇듯 싫어해서야 무슨 일을 하겠느냐!’ 바로 세 아들에게 걸어서 가평으로 돌아갔다가 이튿날 다시 걸어 올 것을 명했다.

세 아들 중 한 사람인 이존수는 이천보 전 영의정의 손자요 현 이조판서의 아들이지만 불호령을 받고 돌아갔다가 다시 걸어왔다. 이처럼 엄한교육을 받고 자란 이존수 또한 후에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언행과 침묵함이 법도에 맞았고, 지휘하고 일을 살피는 것이 공정하고 민첩해서 간교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속일 수 없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21대 총선에서 당선되자마자 수사 받는 의원들이 여당에서 50여 명, 야당에서도 상당수가 있다고 한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패거리들을 위해 이용한지 오래 된 ‘내로남불 정치판’에서 반칙과 비리로 얼룩진 패악적인 이들에게 법이 얼마나 공정하게 심판하는지 한국 민주주의를 가늠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