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초위왕(走肖爲王)’ 데자뷔
‘주초위왕(走肖爲王)’ 데자뷔
  • 등록일 2020.07.05 19:28
  • 게재일 20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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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선조실록에는 1519년 11월, 그러니까 조선 중종 임금 때 훈구파가 기상천외한 모략으로 젊은 개혁파 조광조를 제거한 기록이 등장한다. 궁궐 뽕나무 잎에 꿀로 ‘조(趙)의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뜻의 ‘주초위왕(走肖爲王)’ 글씨를 새겨 뜯어먹게 하고, 중종은 그 나뭇잎을 역모의 증좌(證左)로 삼아 조광조를 능주(전남 화순)로 유배했다가 사사했다는 역사다.

몇 해 전 인하대학교 민경진 생명과학과 교수 연구팀은 흥미로운 연구결과 하나를 발표했다. 기묘사화의 발단이 된 ‘주초위왕’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었다. 실험팀은 관악산 일대에서 나뭇잎 뒷면에 임금 ‘왕(王)’자를 써두고 곤충의 섭식 여부를 조사했지만, 벌레가 먹은 나뭇잎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소문만으로 관리를 탄핵하는 풍문탄핵(風聞彈劾)이라는 어이없는 제도가 있었다. 누군가 탄핵을 받으면 사실 여부를 떠나 일단 그 자리에서 물러나 조사를 받는다. 그러나 탄핵 내용이 허위로 밝혀지면 그를 주도한 대간(臺諫: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리)이 처벌을 받았다. 풍문탄핵은 골육상쟁으로 치달은 사화 비극의 촉매가 되기도 했다.

여당 정치인들의 ‘윤석열 찍어내기’가 점입가경이다. 정권 초기 전 정권을 겨눈 ‘적폐청산’의 날랜 칼솜씨로 집권세력의 온갖 찬사를 받던 윤석열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과 민주당 의원들로부터 가공할 융단폭격을 받는 중이다. 추미애 장관이 권력 핵심으로부터 ‘찍어내기’ 밀명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검찰총장을 향한 추 장관의 잇따른 발언의 품격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다만 자신의 과거 언행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언이 한둘이 아니어서 추 장관이 멀쩡한 이성을 지키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한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부르대던 그가 ‘검언 유착’이라는 네이밍으로 수사 중인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대목은 아연실색할 정도다.

‘검찰 개혁’의 본질은 ‘정치적 독립’이다. 그런데 추 장관이 조장하는 검찰 내부의 패싸움은 오히려 권력에 줄 서는 ‘정치검찰’을 양산하고 있다. 윤석열 총장의 행동이 ‘항명’이라면, 윤 총장에게 반기를 든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의 행태는 더 심각한 ‘항명’이다. 민주당은 혹여, 비망록에 ’검찰장악’이라고 써놓고 ‘검찰개혁’이라고 우기는 건 아닌가. 말 없는 윤 총장을 지지하는 국민이 늘어가는 민심을 엄중히 읽어야 할 것이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에 대한 인하대 연구팀의 연구결과를 놓고 ‘그런 사건이 없었다’고 해석하는 건 심각한 오류다. 조광조를 왕권 강화에 이용한 중종은 급진개혁에 피로를 느꼈고, 훈구 세력은 그 틈을 파고들어 역모를 조작하는 ‘풍문탄핵’으로 기묘사화를 일으켜 신진 사대부들을 제거한 것으로 읽는 해석이 상식에 부합한다. 인하대 팀의 실험은 그 시절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실험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꿀을 먹자고 글자를 따라 이파리까지 뜯어먹는 멍청한 벌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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