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가 잘 기록된 시집과 백석평전.

“어마야, 이기 무신일이고/가시개로 끄내기를 짜르고/보루박꾸를 열었디마는/모티 있는 꿀캉 지렁도 꺼꿀고/여불때기 메루치 코짱배기에도/양가세 있는 오그락지에도/늙은 호박 몸띠 우에도 노랑 꽃가리분/중략”(구순희 시인의 ‘우끼는 택배’중)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만이 이해 가능한 시이다. 가위로 택배박스를 자르니 꿀과 간장이 뒤집혀있고, 무말랭이와 호박 위에 송화가루 봉지가 멸치에 찔려 노랗게 덮고 있는 것을 묘사했다.

백석 시인 또한 고향 사투리로 시를 썼다. ‘여우난곬족’이란 시에는 오리치(오리잡는 도구), 반디젓(밴댕이젓), 술국막질(숨바꼭질), 조아질(공기놀이)같은 시인이 살던 그 시대에 살아 숨 쉬던 말로 써서 지금의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지금 평안도 말이 백석이 노래했던 시와 같지 않고 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기록한 덕분에 평안도 사투리를 읊조릴 수 있다.

사투리는 작가들에게 글의 중요한 소재이다. 자기가 나고 자란 곳의 말이기에 작가의 마음을 서술하기에 표준말 보다 더 정곡을 찌르는 표현일 것이다. 평안도 사투리가 나올 때마다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그랬더니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웠다. 사투리란 것이 입말이니 일부러 기록하지 않으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만다.

어느 해 늦가을, 신작로에 나가니 저 아래 점방 근처에 사는 동네 오빠가 저만치 앞서 가는 친구를 향해 손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양아~, 여 유꾸 캤나?” 게릴라전 하는 투사들의 암호 같은 이 말은 “재양아, 너희 집 무를 캤느냐?” 라는 뜻이다. 친구이름을 줄여 양, 너희가 여, 무는 안동 사투리로 유꾸였다.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그 오빠의 말투가 재밌어서 친구들과 며칠을 깔깔거렸었다.

내가 살았던 동네에서만 사용하던 말이 하나 더 있다. ‘오케라’, 친구의 말이 진짜냐고 되물을 때 사용한다. “앞 집 얼라가 꼬닥거리다가 질바닥에 온 얼굴을 갈아부쳤단다.”“ 오케라?”“ 얼굴이 그래가 아치라바 몬 보겠다.” 앞 집 애가 까불다가 길바닥에 넘어져 얼굴에 생채기가 생겼다. 진짜? 얼굴이 그렇게 되어 안쓰러워 차마 보기가 안타깝다 이런 뜻이다. 오케라는 오른손처럼 ‘옳다’에서 파생된 것이 아닐까싶다. 옳게라 하다가 받침은 떼어먹고 오케라만 발음하게 되었을 거라 짐작한다.

‘아치랍다’를 사전에서 찾으면 안쓰럽다의 사투리로 나온다. 하지만 안쓰럽다란 말로 퉁치기엔 뜻이 조금 모자란다. 아슬아슬한 것이 위태롭고 조마조마하고 안되 보여서 못 보겠다는 마음을 더 보태야 한다. 그렇게 길게 표현해야 아치랍다의 늬앙스를 다 담을까 말까다. 그래서 글을 쓰다 어느 순간에는 안쓰럽다 안타깝다 대신에 아치랍다라고 써 넣기도 한다. 내 글의 독자는 대부분 경상도 사람이니까 하고 말이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수필가

‘다라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어라서 큰대야로 바꿔 쓰라고 하지만 할머니에서 엄마로 이어져 내게 오기까지 다라이는 큰대야와는 다른 쓰임새였다. 대야는 세수할 때나 쓰지 김장 담그려고 배추 서른 포기를 소금물에 절일 때 쓰지 못 하는 것이다. 그러니 큰대야는 다라이를 대체하기엔 조금 버겁다. 지분대다(귀찮게 하다), 기지기매지기도 없다(움직임이 없이 조용하다), 불부다(부럽다),쭉담(뜰)…….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사투리가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들을 때마다 하나씩 적어 놓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20년 넘게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만 했다. 제사상도 생일상도 시키는 대로 차렸다. 하지만 이제 어머님이 안 계신다. 시부지기(슬그머니) 귀찮은 음식 하나씩 빼 먹기도 하고, 맥지(공연히) 가족들이 좋아한다는 핑계로 새로운 음식을 제사상에 올리기도 한다. 짜달시리(그다지) 따지는 형제도 없어 이제 집안 대소사는 내 쪼대로(마음대로) 해도 된다. 사투리도 글에 슬쩍 끼워 넣듯이 말이다. 그래도 자꾸만 어머니 말씀이 내 귓가를 맴돈다. “잘한다 잘한다카이 행주에 풀한다드니만.” 꾸중하는 소리도 얼른 받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