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한옥의 고즈넉한 멋… 고대와 현대가 숨쉬는 곳
전통한옥의 고즈넉한 멋… 고대와 현대가 숨쉬는 곳
  • 홍성식 기자
  • 등록일 2020.06.25 19:41
  • 게재일 2020.0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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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
③ 교촌마을

경주 교촌마을 전경. 예로부터 보존된 향교와 최씨 고택을 중심으로 전통한옥마을을 복원했다. 교촌마을은 관광객이 직접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는 체험장과 최 부자 아카데미 교육장 등 관광과 교육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경주 교촌마을 전경. 예로부터 보존된 향교와 최씨 고택을 중심으로 전통한옥마을을 복원했다. 교촌마을은 관광객이 직접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는 체험장과 최 부자 아카데미 교육장 등 관광과 교육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경주 나들목을 지날 즈음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가 교촌마을 기와를 적시고 있었다.

오래 전 멋을 그대로 간직한 고풍스런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경주향교 처마 아래서 가늘게 흩뿌리는 비를 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어디선가 학자들의 웅성거림과 학동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1천 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 온 왕조. 신라는 우리들 기억 속에서 여전히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제국’이다. 곳곳마다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적과 유물이 가득한 경주. 수십 번을 다시 찾아도 여전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던지는 공간.

교촌마을 역시 마찬가지다. 자그마치 1천300여 년 전 나라의 인재를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 서라벌의 지도자들은 최고의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국학(國學)이었다. 경주 교촌은 바로 그 국학이 자리했던 곳이다.

기자가 교촌마을 찾은 건 이번이 3번째. 지지난해 늦여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땐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을 깨달았기에 땀 흘리며 마을을 돌아본 보람이 있었고, 다음 번 가을에 찾아갔을 땐 고대와 현대가 불화하지 않고 공존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교촌마을은 말끔하게 정비된 주차장이 있고, 첨성대, 동궁, 월지 등 경주의 다른 명소와 가까운 까닭에 적지 않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근처엔 이른바 ‘경주의 맛집’도 적지 않다.

 

신라 신문왕 2년 국가 최고 교육기관
국학 자리에 세워진 ‘경주 향교’
최부자의 얼이 서린 고택 등 전통 가옥들
기와의 고풍스러운 풍경에 옛스러움 가득

경주 향교 인근의 신라 제17대 내물 왕릉.
경주 향교 인근의 신라 제17대 내물 왕릉.

◆ 교촌마을의 중심 ‘경주향교’에 얽힌 이야기

궂은 날씨 탓인지 여행자가 많지 않았던 초여름 평일 오후. 한참을 국학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경주향교 아래서 고즈넉한 풍경을 즐기고 있자니, 교촌마을의 자랑이자 신라의 보물이기도 한 이곳이 어떤 이유로 세워진 것인지 궁금했다. 이 의문에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편찬한 책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이 친절한 답을 들려준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제도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신문왕 2년(682)에 국가 최고 교육기관이며 국립대학이라 할 국학을 확충하고 크게 정비하였다. 국학은 이후 약 1세기 동안 적지 않게 발전을 하였다. 왕들이 역대로 국학에 나아가 박사(博士)들에게 경의(經義)를 강론케 하는 등 명실상부한 유교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통치자들은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국학은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주향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다. 대성전, 명륜당, 전사청, 내신문 등이 세월의 이끼를 끌어안고 존재하는 곳.

이곳은 신라시대 국학이 설치된 위치고, 고려 때는 향학(鄕學)이 있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학문을 탐구해 시대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청년과 선비들의 열정은 신라, 고려, 조선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수많은 ‘흥미로운 스토리’를 간직한 교촌마을과 경주향교. 그래서일까? 이화여대 김민정의 논문 ‘스토리텔링을 적용한 문화적 장소 브랜드 디자인 연구’는 교촌마을의 변화·발전 방향을 아래와 같이 조언한다.

“오늘날은 문화적 역량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다. 문화는 국민의 삶의 질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가치가 되었고, 그중에서도 전통문화는 한 국가와 민족의 문화 정체성을 알 수 있는 수단으로 자리했다. 가히 문화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의 원천인 문화유산을 보존·관리하며 가치를 높이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몫이다.”

지역에 존재하는 문화재와 유적은 지방자치단체의 관광 경쟁력과 직결된다. 이 사실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특히 경주처럼 한국 어느 지방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국보·보물급 유적과 유물을 다수 가졌다면 이것들의 향후 보존·개선 방안을 수립할 때 위에 인용된 김민정의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경주 향교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 교촌마을에서는 기와지붕이 중첩되는 고풍스러운 풍경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경주 향교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 교촌마을에서는 기와지붕이 중첩되는 고풍스러운 풍경을 쉽게 접할 수 있다.

◆ ‘가진 자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던 경주 최부자집

경주향교를 지나 우산 아래 다정하게 걸어가는 중년 부부의 뒤를 따라 교촌마을 곳곳을 돌아봤다. 곳곳에 세워진 관광안내판이 친절하게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외국인도 두어 명 만났다. 비교적 간략하게 경주의 유명 관광지를 요약·설명하고 있는 경주시 문화관광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니 교촌마을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경주 최씨 고택과 중요무형문화재 경주 교동법주가 자리 잡고 있는 교촌마을은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얼이 서린 곳이다.

최부자집에서 가훈처럼 내려온 원칙은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후략).”

예나 지금이나 양심적인 부자가 되기는 어렵다. 물질적인 것이건 정신적인 유산이건 인간이 그걸 포기하거나 나누는 건 양보의 태도와 너른 마음씨 없이는 행해질 수 없기에.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앙가주망(Engagement·지식인의 사회 참여)이 쉽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최상급의 부를 누리면서, 재산을 아낌없이 주위와 나누고자 했다는 지향만으로도 최부자 가문은 ‘높은 도덕성’을 지녔으리라 짐작된다.

여기에 이 문중 사람인 최준(1884~1970)은 일제강점기에 가혹한 수난을 겪으면서도 항일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니, 경주 최씨 집안은 그저 돈이 많은 가문만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최준에 관한 보다 많은 정보는 교촌마을 안내판에서 얻을 수 있었다.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대한광복회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심한 옥고를 겪었다. 이와 함께 최준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 등과 ‘동경통지(東京通志)’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기여하였다.”

존재하는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현재의 경주 최씨 고택은 17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 영남 지방 주요 건축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췄고, 사용된 재목들도 일반 가옥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고급품이다. 한때는 부지 2천 평의 99칸 대저택이었으나, 1969년 화재로 사랑채과 행랑 등이 소실됐다. 여러 개이던 쌀 보관창고도 하나를 제외하고는 사라졌다. 기자가 찾은 날도 문화재청의 주도로 보수가 진행 중이었다.

경주 최씨 고택은 빼놓을 수 없는 ‘서라벌의 보물’ 중 하나다. 많은 이들이 빨리 제 모습을 복원해 그 위상을 이어가길 기대하고 있다.

 

조선시대 성종 23년(1492)에 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3년(1600)에 재건한 경주 향교 대성전과 주변의 건물의 모습.
조선시대 성종 23년(1492)에 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3년(1600)에 재건한 경주 향교 대성전과 주변의 건물의 모습.

◆ 활짝 갠 ‘빛나는 날’이 다시 오기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폭풍이 한국을 휩쓸기 전 교촌마을은 예스런 전통가옥 안에서 이에 어울리는 각종 체험관광을 즐기는 여행자들로 붐볐다. 그런 흥겨운 시끌벅적함이 일상이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은 딸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카메라 앞에서 재롱을 부렸고, 어린 아들은 엄마를 따라 서툰 솜씨로 색깔 예쁜 국수를 밀었다. 국악을 들으며 신나게 떡메를 치는 관광객들의 웃음이 가득했다. 최근 찾은 교촌마을은 지난해에 비해 눈에 띄게 한산했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루이제 린저(Luise Rinser·1911~2002)의 말처럼 세상에 영원히 계속되는 고통은 없고,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주는 고통과 어려움 또한 마찬가지일 터.

교촌마을을 나와 인근 식당에서 더위를 식혀줄 냉면 한 그릇을 주문했다. 바로 앞에선 내물왕릉이 비를 맞고 있었다. 경주에서만 볼 수 있는 그 돌올한 풍경을 보며 활짝 갠 교촌마을의 빛나는 날이 어서 다시 오기를 기원했다. 그건 비단 기자만의 바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 이용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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