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에 대하여
인연에 대하여
  • 등록일 2020.05.27 18:48
  • 게재일 202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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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까까머리 학창시절 피천득의 ‘인연’은 언제나 가슴 통증으로 다가왔다. 몇 번을 읽어도 그와 아사코의 가슴 시린 사연은 익숙해지지 않는 생채기였다. 어린 아사코와 대학생 아사코, 그리고 점령군의 아내가 되어버린 아사코. 피천득에게 영화 ‘쉘부르의 우산’을 좋아하게 해준 연두색이 고왔던 우산 이야기는 지금도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그와 아사코의 세 번에 걸친 만남은 악수도 없이 절만 하는 것으로 끝난다.

뾰족한 지붕에 뾰족한 창문이 달린 집에서 함께 살자 했던 아사코.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허망하고 황망하다. 인연처럼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불가(佛家)에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緣)을 묶어서 인연이라 한다. 대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이 관계 맺는 것을 인연이라 말한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설정과 진행 그리고 결과를 통칭해서 인연이라 한다.

인터넷에 올라온 어느 무녀(巫女)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신내림으로 강신무가 된 그녀의 글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데가 있었다. 무엇보다 전생과 이생 그리고 후생에 대한 말이 그러했다. 원수지간의 전생이 부부의 인연으로 이생에서 구현된다는 말. 왜 하필 전생의 원수가 서로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해로(偕老)를 함께 하는 것일까?!

붙잡아도 떠날 인연은 작별을 고하고, 아무리 험하게 대해도 남을 사람은 옆에 남는다는 글을 읽으면서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진다. 그래서 그녀는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고 한다. 문제는 거기서 출발한다. 가려는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내가 싫은 사람 막아서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 아닌가. 마치 대각(大覺)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무연(無緣)하게 생각을 전달하는 무녀의 심사가 문득 궁금하기도 하다.

사람 하나 보내는 일은 세상 하나와 작별하는 것과 같다. 사랑을 잃은 기형도가 ‘빈집’에서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하고 울먹이는 것은 공감이 간다. 그녀가 떠난 빈집의 문을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잠그는, 홀로 남겨진 시인의 고독과 황량한 내면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사내의 어깨 주위로 켜켜이 내리는 어둠이 눈에 밟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필시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의지나 욕망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충돌하고 파찰음을 낼 때, 그리하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난파할 때 인연은 작별을 고한다.

하나의 인연이 혹은 사랑이 또는 관계가 지나가면 크고 작은 흔적이 나이테처럼 생겨난다. 말 못 할 마음으로 흔적과 상처를 돌이키다 보면 그래도 다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을 채우기 시작한다. 영원한 작별 후에도 어디선가 새로운 생은 시작되는 법이므로.

인연이 다한 사람 하나 보내고 한밤중 어둑한 방 그늘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 문득 ‘인연’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 여기까지야! 어디서 무얼 하든 부디부디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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