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 달린 51일째… 유럽의 동쪽 끝에 서다
서쪽으로 달린 51일째… 유럽의 동쪽 끝에 서다
  • 등록일 2020.05.19 18:51
  • 게재일 202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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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행의 반환점에서

유럽의 동쪽끝 호카곶. 대륙횡단여행자 대부분이 이곳을 목적지 삼아 달린다.
유럽의 동쪽끝 호카곶. 대륙횡단여행자 대부분이 이곳을 목적지 삼아 달린다.

◇ 2만2천400㎞, 리스본 도착



P에게 연락이 와서 리스본에서 만나기로 했다. P는 나와 반대 방향으로 유럽을 달리는 중. 유라시아 횡단 여행자의 반환점, 혹은 종착점은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호카곶이다. 유럽의 가장 서쪽에 있는 그곳에서 횡단여행의 마침표를 찍는 경우가 많다.

동해항에서 똑같이 출발하고 돌아가는 일정도 얼추 비슷한데 유럽 일정은 정반대다. 대부분 여행자들은 호카곶에 왔다 스페인에서 배로 오토바이를 한국으로 보내고 비행기로 귀국한다.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돌아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루 더 쉬었다가 상태가 나아지면 출발하려고 했는데(세르반테스 동상 인증샷도 찍고) P와 다시 유럽에서 만나기도 쉽지 않을 듯해 리스본으로 왔다. 한낮 더위를 피하려고 아예 새벽에 출발했다.

리스본에 와서 엔진오일과 오일필터, 뒷타이어를 갈았다. 모토밀(Motomil)에서 소모품을 교환했다. 한국에서 이곳까지 오토바이로 왔다니 너무나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동. 부품비 할인도 받았고 출발하기 전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도로를 돌아나오는 데까지 지켜보며 환송해 감동했다. 혹시나 맡겨 놓고 기다려야 하나 걱정했는데 아주 빠르게 처리해주었다.

깨끗하게 세차를 해준 건 기본이고 고정 스트랩, 생수까지 챙겨주는 친절함이라니. 지금까지 달린 거리 약 2만2천400㎞. 내일부턴 집으로 돌아간다. 달릴수록 집과 가까워진다. 두 번째 단락을 끝맺은 기분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니….

저녁에 현묵 씨를 만나 서로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풀었다. 바르샤바에서 헤어졌으니 그동안 서로 꽤 많은 이야기들이 쌓였다. 역시 더위로 고생한 것이 단연 첫 번째. 나는 이제 북으로 올라가니 더위에선 멀어져 안도하고 현묵 씨는 남쪽으로 가니 걱정이다.

 

리스본 모토밀에서 엔진오일 등 소모품을 교체했다. 모토밀 직원들과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리스본 모토밀에서 엔진오일 등 소모품을 교체했다. 모토밀 직원들과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간직한 도시 리스본



햇살은 따갑지만 스페인 내륙에 비하면 리스본은 선선한 편이다. 마젤란 동상에서 상조르즈 성까지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마젤란은 조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에스파냐(스페인) 왕가의 후원으로 세계 일주를 떠났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진실’을 보여주었고 아메리카 대륙 남단 마젤란 해협을 개척하고 필리핀까지 이르렀지만 그곳 원주민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모험가였지만 향료 무역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무역상이기도 했고, 가는 곳마다 원주민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열렬한 전도사 노릇도 했다.

결국 그는 끝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지휘했던 5척으로 이뤄진 ‘몰루카 함대’ 중 빅토리아 호만 천신만고 끝에 정향을 싣고 에스파냐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한 척에 실렸던 정향만으로도 함대의 모든 원정 비용을 회수하고도 남았다. 미각에 눈을 뜬 당시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고 대항해시대를 여는 기폭제였다.

리스본은 정말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아랍, 아프리카 사람들이 절반은 되는 듯하다. 의외로 중국인들이 많아 놀랐다. 번화가에 차이나타운으로 불릴 만한 곳이 있었고 그곳 외에도 중국인이 운영하는 가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포르투갈은 한때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제국이었지만 지금은 유럽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국가다. 인구는 천만 명 정도고 영토도 그리 크지 않다.


시내 중심가를 걷는데 오랜 세월 정체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낡고 훼손된 건물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활력을 느낄 수도 없었다. 잠시 스쳐가는 처지에 속단할 수는 없다. 내내 빵과 샌드위치, 우유만 먹다 케밥집에서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었다. 유럽을 여행하며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배부르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곳이 케밥집인 듯하다. 터키, 인도계 사람들이 운영하는 케밥집을 대도시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간직한 리스본은 다양한 인종이 뒤섞인 도시다.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간직한 리스본은 다양한 인종이 뒤섞인 도시다.


◇ 유럽의 동쪽 끝, 호카곶에 도착하다



집을 떠나 서쪽으로 달린 지 51일째 드디어 호카곶에 도착했다. 유럽의 서쪽 끝에서 대서양을 마주보고 섰다. 몸이 휘청일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었다. 옛 뱃사람들은 이 바람을 타고 아메리카로 아프리카로 나아갔겠지. 만약 그 시절 태어났더라면 나도 뱃사람이 되어보았을 텐데.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구름이 내려앉았지만 빗방울이 떨어지진 않았고 덕분에 종일 시원했다. 내륙보다 바다를 끼고 가는 길은 확실히 기온이 낮다. 이 정도 날씨가 계속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스페인 북쪽 해안을 타고 가다 결국 프랑스 내륙을 거쳐야 한다.

유럽 내륙은 여전히 폭염에 시달리고 있지만 30도 이상만 올라가지 않으면 별 문제 없이 달릴 수 있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추위와 더위를 아주 골고루 경험했다.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가는 동안 어떤 날씨를 경험할지 알 수가 없다.

엔진오일과 타이어를 교체하고 체인 루브까지 칠했더니 확실히 매끄럽게 잘 나간다. 이제 엔진오일만 두 번 교체하면 더는 신경 쓸 것이 없다. 오일필터는 여분으로 모토밀에서 구입했다. 앞서 겪었던 사고 같은 일만 피하고 이제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잘 쉬며 달리는 일만 남았다.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던 렐루 서점.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던 렐루 서점.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무리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달리다보면 다음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로틀을 당길 때가 많다.

출발할 때 예상과는 다르게 날씨나 도로 상태뿐만 아니라 온갖 변수들이 생기니, 그 변수들을 최소한의 에너지를 써서 극복하는 게 오토바이 여행의 묘미다.

산티아고 오는 길에 포르투 렐루 서점에 들렀다. 정확히는 겉만 보고 왔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포기했다. 구경하고 나온 손님들만큼 입장할 수 있다. 근처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왔는데도 줄은 그대로였다.

렐루 서점은 책을 파는 서점이라기보다 관광명소라고 해야겠다. 오랜 시간 이곳에 오길 바랐는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책과 오랜 역사를 품은 공간이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듯하여 아쉬운 마음이 크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서점이 자리를 지키고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다 생각한다. 사라지는 것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옛 역할을 할 수 없더라도 간판을 내리지 않는 게 낫지 않나. 돌아가면 다시 책방 문을 열어야 한다.

 

포르투는 옛 시가지를 잘 보존한 도시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포르투는 옛 시가지를 잘 보존한 도시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딱 지치지 않을 만큼 에너지를 쓰며 버틸 생각이다. 줄어든 몸피만큼 에너지도 줄일 수 있겠지. 가만히 엎드려 책방에서 혼자 꼼지락거리며 할 수 있는 재미난 일을 찾아야겠다. 멀리 돌아다니는 건 이번 여행을 끝으로 더는 하기 힘들테니.

산티아고 숙소는 순례자들로 넘친다. 16개 침대에 빈자리라곤 딱 2개. 한국에서 온 순례자가 그중 3명(1명은 정확하진 않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오니 실감할 수 있다. 도보 여행자야말로 여행의 순수한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내일은 산티아고에서 하루 쉬고 모레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팜플로나에 갈 계획이다.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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