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슬픔
찬란한 슬픔
  • 등록일 2020.04.06 19:04
  • 게재일 20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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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명 시인
조현명 시인

봄이 되니 지천에 꽃이다. 벚꽃은 벌써 지고 개나리 철쭉이 산천에 잔치를 벌인다. 꽃이 피니 세상이 밝아지고 아름답다. 바람에 꽃잎이 휘날려 밝은 빛이 내린 듯 열기가 가득하다. 그야말로 신천지다. 헉 여기에 신천지가 나오다니.

그러고 보니 세상은 양면성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좋은 뜻을 담고 있는 단어가 온 세상의 지탄이 된 사이비종교의 명칭이었다니….

코로나19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우한’과 ‘신천지’ 등이다. 우한의 봄에도 꽃이 필 것이고 신천지의 교단에도 꽃을 장식하고 꾸미는 헌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이 꽃 잔치를 슬픔과 죽음의 상가로 바꾸었다. 바깥 세상에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 피고 기쁨의 빛이 넘쳐흘러도 코로나19로 집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림 속의 덧없는 풍경일 뿐이다.

몇 해 전 젊은 조카가 세상을 떠났다. 어찌 되었건 그해 봄날 벚꽃아래에서 웃고 찍은 사진을 보면서 누나는 오열하고 만다. 벚꽃아래에서 웃고 떠들던 그 음성조차 잊지 않고 기억나고 지워지지 않는다. 벚꽃만 피면 그 찬란한 슬픔 때문에 꽃구경은커녕 눈물로 적신다고 했다.

올해 봄 코로나19로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은 역시 이 꽃 잔치를 슬픔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찬란한 슬픔이라고 이름 지어도 괜찮을까?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꽃이 아름다워 마음속에 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사람 세상의 꽃은 어린이, 젊은이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순간에 더러워지고 추해지는 것이 꽃이기도 하다.

목련이 필 때의 아름다움보다 목련이 지고 난 뒤 그 시체들의 추함을 나는 주목한다.

물론 그것도 곧 바람에 쓸려나가고 말테지만 꽃들은 다 죽음을 안고 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추한 것은 가까이하지 않고 밝고 예쁜 것을 가까이하려 한다. 그러다보니 꽃이 진자리는 주목하지 않는다. 사실은 꽃이 진자리가 진면목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확대한 모습을 보면 마치 꽃 같다. 물론 왕관과 같이 생겼기 때문에 코로나라고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 같다. 저들의 사멸과 결국은 똑같을 것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것 말이다.

모질지만 사람은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난다.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숙명이요 희망이기 때문이다. 꽃들은 다 그 죽음을 딛고 일어섰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이제부터 꽃을 그대로 보지마시길…. 저것들이 저마다의 깊은 슬픔을 안고 아름답게 꾸미고 나와서 새로운 희망을 선사하고 있다는 것을…. 저것들이 짐짓 세상의 슬픔은 혼자서 다 감당하겠다고 찬란하게 폭발하고 있음을…. 미당은 시 ‘봄’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복사꽃 픠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무처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눌이어. 피가 잘 도라…. 아무 病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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