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하고 아름다운 사명암 풍경. 사명암은 경남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108에 위치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소나무 숲길을 접어들 때 기억 속의 자장매가 마중을 나온다. 무작정 달려와 홍매 앞에 서던 때가 있었다. 외로움도 아름답던 시절이었다. 오늘은 산내 암자 중 가장 아름답다는 사명암을 찾아 가는 길이다.

절은 사명대사가 모옥을 짓고 수도하면서 통도사의 금강계단 불사리를 수호하던 곳을 1573년(선조 6년) 사명대사를 흠모하던 이기(爾奇)와 신백(信白) 두 스님이 창건했다. 그 뒤 조사당을 비롯해 두 동만 남은 것을 동원(東園) 스님이 중수, 증축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크고 아름다운 사명암을 바라보며 매화 한 그루 꽃을 피워 고독하다. 수줍고 은은한 자태가 겨울 사명암을 지킨다. 기품 넘치는 당우들과 잘 꾸며진 정원은 쉽게 접근하기 힘든 명문가를 연상시킨다. 연못 위의 다리를 건너야 극락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선뜻 다가설 수 없다. 몸도 마음도 조심스럽다.

부처님 계신 법당부터 들러야 하는데 종종 걸음으로 서편에 있는 요사채로 향한다. 아담한 대나무 숲 아래 스님의 공방과 차실이 딸린 별채가 보인다. 소박하다. 간헐적으로 풍경소리 홀로 울고 스님은 열심히 작업 중이다. 난롯불에서 갓 구워낸 고구마와 커피 한 잔이 기다리는 곳, 결코 어색하거나 낯설지가 않다.

오랜만에 뵙는다. 여전히 차실에는 스님 닮은 소품들이 시간을 품고 살아간다. 독특한 안목과 감각들이 살아 숨 쉬는 작품들은 꽃 진 자리를 노래하거나 그리운 시간들을 향해 달려간다. 어수선한 인사 속에서도 음악은 무심히 흐르고 스님은 커피를 내리신다. 이 모든 것이 변함없이 익숙하다. 커피 맛은 여전히 깊고 안정적이다. 맛의 팔 할쯤은 공간이 주는 아늑함과 스님의 그 무심한 듯 편안한 거리 때문이리라.

커피도 차도 잘 어울리는, 내게 처음으로 낙관을 만들어주신 도심(道尋) 스님이다. 누군가 불교는 믿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이라고 했지만, 스님 앞에서는 즐기는 것으로 변한다. 믿는 것도 닦는 것도 힘겨워질 때, 나는 스님의 공간이 생각난다. 성직자와 예술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스님의 세계를 엿보다 보면 내 안에 숨어 있는 내가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오늘도 별 말씀이 없으시다. 떠드는 이야기 들어주고 희미하게 웃어주실 뿐, 찻잔이 비지 않도록 차를 따르는 모습은 마치 오래도록 알고 지낸 단골 찻집의 주인 같다. 그 무심의 편안함을 찾아 전국 각지에서 불자들이 먼 길을 달려오곤 한다. 그들도 나처럼 격식과 틀에 끌려 다니지 않고 위안 얻으며 자기 찾는 일에 기쁨을 얻는지 모른다.

외로움이 피워낸 스님의 작품들은 늘 따뜻한 곳을 향한다. 마주보는 외로움이 상쇄될 정도로. 중요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이신 동원(東園) 주지 스님의 전통적인 예술혼과 영혼을 밝히는 도심 스님의 자유로운 예술관이 더해져서일까. 사명암은 여느 절집과 다르다. 대부분의 사찰이 주지 스님의 분위기를 닮아가듯 집도 주인을 닮는다. 두 스님은 어떤 분인지 명료하게 그려지는데 정작 나는 어떤 유형의 인물인지 가늠하기가 힘들다.

스님이 매화꽃을 따서 찻잔 속에 띄운다. 친구의 여유로운 화술도 내 불면의 날들도 찻잔 속에 녹아들고, 우리는 잠시 말을 끊고 봄을 영접한다. 겨울을 건너온 생명의 전령에 대한 예의다. 한 잔의 매화차 앞에서 기도하듯 겸허해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사랑스러운 일인가. 은은한 차향이 외롭고 가난해진 마음을 적신다.

군자를 연상시키는 격조 높은 꽃,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아 안락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매화는 세한삼우(歲寒三友) 중 하나다. 올곧은 지조를 상징하는 그윽한 자태는 벚꽃처럼 야단스럽지 않고 배꽃처럼 고독해 보이지도 않는다. 매화향에 취해 겨울이 또 그렇게 가고 있다. 스님의 입춘지에 앉아 있던 한 마리 노랑나비가 무심코 날개를 파닥인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차실을 빠져나와 혼자 극락보전으로 향한다. 불 꺼진 법당은 차고 썰렁한데, 수미단 위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가만히 앉아 두서없이 엉켰던 한 주를 돌아보고, 노화된 육체의 경고 앞에서 당혹스러웠던 순간의 서글픔도 풀어낸다. 어쩐 일인지 법당 안 부처님이 나보다 더 외로워 보인다.

절은 화려한데 오늘은 인적이 없어 쓸쓸하다. 법당을 나서다 무작정(無作停)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미리 정한 것 없이 무작정 찾아올 인연이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부처님의 온화한 시선이 느낌으로 앉아 있는 곳, 그 작은 위안을 찾아 언제나 함께 나서주는 문우가 있어 고맙다. 온통 내 주변이 따뜻해져 온다.

오래된 배나무와 감나무가 상흔으로 얼룩진 거친 수피로 영각을 지키고, 담장 아래에는 이름 모를 새싹들이 다투어 고개를 내민다. 목련과 만리향의 눈빛도 심상치 않다. 사명암은 온통 소생의 기쁨을 알리는 봄소식으로 술렁인다. 눈물겹도록 경이로운 이 모든 것들도 외로움의 소산이리라.

내 안에 어룽어룽 차오르는 봄날을 위해 사명암이 가만히 손을 내민다. 부처님은 여태 밖을 서성이셨던 모양이다. 매화향 은은히 지는 겨울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