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만든 경북여성 (2)
일제 강점기 육영사업의 어머니
최송설당 (上)

최송설당.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보모로 잘 알려진 최송설당은 일제치하 당시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고자 전 재산을 쾌척해 경북 김천에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중·고)를 설립해 우리민족의 앞날에 꿈과 희망을 심은 한국육영사업의 어머니다. 경상북도 내 여성 육영 사업가 1호다. 그의 생애는 긴 여정의 시간이었다. 85세를 살었던 그는 조선의 멸망과 주변 강대국의 횡포, 왕족의 비애, 일제 강점기의 고통 등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살아왔다. 역적의 사슬을 풀고 가문을 부흥시켰고, 가난에서 벗어나 가족은 물론 이웃들에게 베풀며,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러내 나라의 독립을 앞당기는데 한 몫을 했다.

 

가난한 아버지 슬하 한학 공부하며 자라
고종의 아들 이은 보모로 덕수궁 입궐
궁궐에서 나온 후 본격 나눔 사업 시작
의연금 기탁·진명여고 건립 부지 기부

△가문의 과업을 짊어지다

최송설당(崔松雪堂·1855∼1939)은 철종 6년 김천시 문당동에서 아버지 최창환과 어머니 정옥경 슬하 3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최송설당의 아버지 최창환은 원래 전라도 고부에 살다가 선조의 세거지를 찾아 김천으로 옮겨왔다.

송설당의 집안은 평안도 선천 부호군이었던 증조부 최봉관(崔鳳寬)이 ‘홍경래의 난’을 맞아 성(城)의 함락을 막지 못하고, 처가마저 난군에 연루됐다는 죄로 옥사하고, 4명의 자식들이 모두 전라도 고부로 유배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서당 훈장이었던 부친 최창환(崔昌煥)으로부터 이같은 집안의 내력을 전해들은 송설당은 가문의 명예를 회복시킬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송설당의 아버지는 조상의 죄 때문에 벼슬길이 막혔다. 김천에서 서당 훈장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지만 늘 가난했다. 송설당은 입을 덜고자 일찍 시집을 갔지만 남편의 죽음으로 다시 친정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때부터 재력을 모아 쓰러진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돈이 되는 일은 어떤 고역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어 돈을 모았다.

△계단식 성장법을 택하다

송설당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첫 시기는 고향인 김천에서 주로 머문 시기로 1855년 태어나서 1894년 상경하기 전까지 약 40년 간이다. 두 번째 시기는 상경 이후 1930년까지 36년간이다. 이 시기에 송설당은 서울에 정착해서 김천을 오가며 살았고, 영친왕의 보모로 지내며, 또한 가문의 신원을 이뤘고, 부를 일궜으며, 정권의 핵심인 고종, 엄비와 친분을 맺었다. 세 번째 시기는 경성에서 고향 김천으로 되돌아와서 여생을 마무리한 약 10년으로 이 시기에 한국 육영사업의 한 획을 그었다.

첫 시기 전반부는 주로 아버지 슬하에서 한학과 한글을 공부하던 어린 시절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직접 장사길에 나서서 천신만고 끝에 부를 일군 시기다. 이 시기에는 아버지로부터 대물림한 집안의 신원 문제에 대해서 방법을 모색했다.

두 번째 시기는 상경과 함께 인생의 승부수를 던진 시기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고종에게 다가서려면 고종의 총애를 받는 엄상궁의 마음을 먼저 얻어야했다. 엄상궁은 고종의 후예를 잉태하기를 기원했다. 송설당은 이런 엄상궁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엄상궁이 아들 낳는 꿈을 현몽했고 엄상궁 동생과 친분을 맺은 후 강남 봉은사에 드나들며 엄상궁의 아들수태를 위한 백일 불공을 드렸다. 출산일이 다가와 최고급 출산용품까지 진상하자 최송설당은 엄상궁의 아들 이은(李垠·친왕)의 보모가 되며 덕수궁으로 입궐했다. 덕수궁에 들어간 지 4년 만에 역적 집안의 족쇄는 풀리고 조상 신원의 꿈을 이뤘다.

 

영친왕 보모시절 회상하는 최송설당.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영친왕 보모시절 회상하는 최송설당.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89년 만에 역적누명을 벗다

광무 5년(1901년 11월) 고종이 ‘몰적(沒籍)의 복권’을 내주면서, 89년 만에‘역적 집안’이라는 낙인을 떼냈다. 송설당은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영친왕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면서‘친왕 보모’역을 마감했다.

약 10년에 불과하지만 송설당의 궁궐생활은 결정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송설당이 궁궐에서 나온 직후 무교동 94번지에 지은 ‘송설당’이라는 큰 집과 곳곳에 낸 의연금 규모를 보면 상당한 재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송설당이 재력을 지닌 시점은 궁궐에서 나온 전후다. 경선궁이라는 궁호를 받은 엄비는 경선궁에 주어진 토지를 교육사업에 쓰기 시작했고, 그 영향을 송설당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엄비가 교육에 뜻을 두고 진명여고 건립에 기부한 땅은 모두 경선궁 소유 땅들이다. 송설당이 김천고를 설립하기 위해서 만든 송설교육재단에 기부한 토지는 몇 지역에 집중되는데, 김천이 대표적이고 김해에도 154 필지나 된다.

△환갑 넘어 사회환원 본격화

최송설당은 중년이 되면서‘나눔’에 본격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송설당이 실천한 첫 나눔기사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등장한다. 당시 미국 동포가 간행하는 공립신보를 보다가 의연금을 모집하는 취지서를 읽고 감동해서 4원을 기탁한 데 이어 1912년에는 김천 교동 주민을 위해서 벼 50섬을 희사했다. 1915년에는 여성운동을 하는 경성부인회에 거액을 기부했고, 1917년에는 김천공립보통학교, 금릉유치원, 금릉학원 등에 유지비를 댔다.

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1930년 6월 29일 김천으로 내려와서 육영사업을 펼치며 여생을 마무리하던 때다. “깨끗한 돈을 교육에 쓰라”고 당부한 어머니의 유언이 크게 작용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시급하게 인재를 키워야한다고 판단을 한 송설당은 김천에 인문계 고보를 짓기로 결정했다. 1930년 신년벽두에 김천으로 내려온 송설당 앞에는 취주악대를 앞세운 환영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송설당이 김천고보를 지을 땅 산록에 자리잡은 정걸재로 향하는 길에도 반기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com

<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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